그녀는 버스 통로 건너편 창문 밖을 내다봤다. 글쓰기가 방향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면, 독자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다면, 언어는 서비스나 도구가(물론 엄청 복잡한 도구이겠지만) 되는 게 아닐까? 적어도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그럴 것이고, 읽는 사람에게도 아마? 그녀는 짜증이 났다. 아마도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는 뭔가가 분명해졌다. 인간은 정체성을 유지하고 흔히 말하듯 삶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다양한 형태의 언어에 의존하지만, 필요에 따라 언어를 도구로 쓴다는 점에서 언어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상정한다.

창문 바깥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들은 그와는 다른 추동을 만들어냈다. 버스는 도시의 녹지대를 지나고 있었다. 공원 같은 곳이었다. 나무를 스쳐 지나가면서 그 전과는 다른 관점이 생겨났다. 한 인간의 삶은 더는 할 말이 없어질 때 끝나는 것일까? 삶은 구간이 아니다. 여기서 저기까지의 구간이나 도로에 그어진 선이 아니다. 삶이 계속 계속 스쳐 지나가는 것이라면 어떨까. 매번의 지나감이 크건 작건 이 세계를 향한 한 사람의 발화이자 제안이라면. 모든 내뱉는 말과 외침이 스쳐 지나감이고, 모든 시작은 다시 돌아오는 것이라면. 전진하는 움직임을 통해 다시 스쳐 지나감의 벡터로 돌아오는 것이라면. 그리고 더는 시작이 불가능해지는 때가 오면, 바로 이 돌아오는 움직임은 정지하고 삶은 용해된다.

다중의 중첩된, 그러나 양립할 수 없는 시간들이 허용되는 삶을 생각해볼 수 있다면 좋겠다. 삶을 어떤 직선이나 구간으로 이해하는 것, 시간을 뚫고 날아가는 되돌릴 수 없는 화살로 이해하는 것은 어딘가 처참한 이미지다. 십대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노인들은 외롭고, 세대 간에 트라우마가 생기는 게 당연하다. 하나로 동질화된 시간에 삶이 얽매일 수밖에 없으니까. 삶을 뭔가 순환하는 것, 도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녀는 약간 오그라들며 이 생각을 수정했다. 전형적인 전생 얘기나,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나, 맙소사, 끈 이론 같은 것을 말하려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이건, 그녀 생각에는, 전적으로 한 개인의 삶에 관한 이야기였다. 스쳐 지나간다는 것은 하나에서 다음으로 간다는 게 아니라, 동시에 서로 다른 속도와 방향성을 가진 여러 스침을 말한다.

일기를 쓸 때 그녀가 시도하는 것은 (전략까지는 아니지만) 생존하기 위해,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혹은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그녀의 능력을 훔쳐 가도록 허용하는 것, 즉 언어가 그녀의 글쓰기 역량(그녀가 아니고)을 소유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언어를 자기 걸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른바 창의적 글쓰기 수업들은 모두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좋은 글이 나오는 건 작가가 언어를 (당연히 자신의 언어를) 소유했을 때, 글에 작가의 서명이 새겨져 있을 때, 글이 사유화되었을 때라는 말.

그녀가 원하는 것은 정반대였다. 그녀는 글을 쓰면서 소유권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글쓰기와 평행하게 움직이면서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잊기를 바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갑자기 밖이 어두워졌을 때. 즐거워서 잠시 자기 자신을 잊을 때 시간은 쏜살같이 흐른다. 글쓰기에 빠져들어 자기 자신을 잊을 때. 정체성이 용해되고, 더는 분간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글쓰기에 이끌려 가도 괜찮다는 허락.

글은 쓰는 동시에 쓰인다는 그런 말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자아와 방향성을 내려놓고, 익명적인, 하지만 동시에 자율적인 글쓰기를 하는 것. 거기서 떠오르는 것은 재료이지 의미가 아니다. 공범의 익명성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다시 창문과 그 너머의 바깥을 보기 시작했다. 창문 그 자체는 대단히 흥미롭지 않았지만 그래도 쉽게 넘겨봐서는 안 됐다. 프레임과 유리창을 연결하는 실리콘은 낡아서 말라 갈라지고 있었다. 그 검은 플라스틱에 남은 시간의 흔적과 다른 세기에서 온 그림의 페인트 균열을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간의 균열과 아우라의 물리적인 증거로 남은 균열. 아우라나 진본성의 인상을 만들어내는 균열.

십대들이 유리창 표면을 긁어서 낙서해 놓았다. 날카로운 물건으로 구멍을 팠다. 그건 길과 도로가 한데 모여 가끔은 도시의 형태를 만드는 지도처럼 보였다. 지식과 비슷한 질감이었다. 규칙과 관습을 의미하는 글자와 구멍, 통과하려면 압력을 가해야 할 정도의 장애물처럼 굳어진 지식.

알루미늄 프레임에는 지금까지 그걸 거쳐 간 것들이 남긴 흔적이 가득 있었고, 그래서 평범하고 그다지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담은 백과사전처럼 보였다. 처음부터 광이나 윤이 나는 표면이 아니었기 때문에 거기에 난 상처들은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전달했다. 조화로운 전체 중 일부처럼 보였고, 그로부터 어떤 특별한 운명이 펼쳐질 것 같았다.

그녀는 프레임을 좋아했다. 경제적, 윤리적, 상징적인 프레임보다는 물리적인 프레임을 좋아했지만, 오늘날 이 세상에서 프레임은 포장지보다 나을 것이 없는 것으로 격하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사는 세계에서 포장은 상당히 저속한 것이었다. 그녀는 포장이 가치를 잃었다는 것이 상당히 모욕적이라고 생각했다. 포장은 결코 평가절하해서는 안 되는 전문 영역이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구매한 물건을 그 자리에서 포장해주는 서비스를 말하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포장은 아주 섬세한 문제이고, 내용물을 보호하는 동시에 돋보이게 하는 것이다. 포장의 역할은 때로는 뭔가를 숨기거나, 심지어는 일종의 익명성을 생성하는 것이다. 그녀는 너무 젊었고 세계의 잘못된 부분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소박한 소포가 뭔지 경험하지 못했다. 무심한 갈색 종이로 포장된 소포나 선물은 몹시 사랑스럽다. 종이의 색깔이나 패턴이 그 물건을 싸는 포장 방법이나 포장 기술에 종속될 때.

정확히 그 기억이 어떻게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책인지 작은 직사각형 박스인지 모를 무언가를 싼 포장 종이를 아주 천천히 검지로 쓸어내렸던 경험에 몰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게 뭐였는지, 종이가 무슨 색깔이었는지, 무슨 상황이었는지조차 기억이 안 났다. 그저 손가락 끝에 남은 물리적인 감각이 떠올랐다. 관습적인 의미에서의 기억이 아니었다. 그 경험을 실제로 다시 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손가락에서 그 경험이 다시 발생했고, 겹친 종이 층들이 피부로 만져질 듯 미세한 느낌을 자아냈다.

속삭이는 듯 미세했지만, 압도적인 감각이었다.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감각은 목을 타고 올라가 진동했다. 이 경험은 목으로부터 뻗어나가 그녀가 있는 공간 전체로 퍼졌다. 손가락 끝의 연결을 통해 공간 전체를 느낄 수 있는 것만 같았고, 그녀 안에 있는 에너지를 통해 증폭되었다. 그녀를 둘러싼 공간이 손가락 피부의 주름 속에 존재했고, 동시에 직사각형 박스를 포장하고 있는 종이의 질감이 주는 감각과 중첩되면서 방은 어느덧 만질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그녀가 있는 곳은 예전에도 머물렀던 곳인데, 그녀의 방은 아니었고 그 방의 주인이 누구인지, 누가 사는지도 몰랐다. 벽은 흰색이었고 바닥은 싸구려 목재였다. 장롱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너무 작게 열려 있어서 그 안에 뭐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 명, 때때로 방문하는 손님을 위한 방이었기 때문에 침대는 퀸사이즈였다. 침대보는 캐주얼했다. 외로움이 살짝 배인 가벼운 에너지를 풍겼다. 오래전부터 그 침대에서는 한 사람만 잤지만, 옷을 입고 자는 경우는 없었다. 늘 벗고 잤다. 때로는 속옷을 입기도 했지만, 티셔츠를 입고 잠든 적은 없었다. 매일 매일 그 침대에서 한 사람이 홀로 눈을 감았고, 아침이 되면 다시 눈을 떴다. 새로 맞이한 하루를 공유할 사람 없이 홀로. 그곳에서 잔 것이 그녀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녀였을 수도 있고 동시에 아니었을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녀가 그녀인 동시에 다른 사람었을 수도 있다. 절박하지는 않았지만, 그곳에 있으면 누군가 함께 할 사람을 찾고 싶어졌다. 발코니 문은 밀어서 여는 유리 패널이었고 바닥에서 천장까지 이어졌다. 창문이 커서 방 안은 밝았고 약간 취약하게 느껴질 정도였지만, 왠지 그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그 노출된 감각은 안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지 바깥으로부터의 침입자나 원치 않는 시선이 아니었다. 에어컨에 연결된 전선이 플러그에 연결되지 않은 채 벽에 늘어져 있었다. 여름도 겨울도 아니고 에어컨이 필요 없는 계절이라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잠시 후 그녀는 직사각형 소포를 양손으로 집어 들었고 두 엄지가 평행하게 나란히 놓였다. 종이의 질감은 더욱더 만져질 듯 생생했다. 그 감각은 피부에서 엄지를 통과해 손목까지 퍼지는 동안 거의 고통스러울 정도의 존재감을 가졌다. 손목에서 느껴지는 종이의 거친 질감은 손이 사라지고 팔로 연결되는 바로 그 지점에 맴돌고 있는 에로틱할 정도의 관능과 뒤섞였다. 그녀는 이제서야 종이가 초록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소 짙은 담녹색이 손바닥의 오렌지빛 감각에 스며들었다. 그 에너지는 그녀의 가슴뼈로 이어지며 그곳에 자리 잡은 초록빛 기운과 공명했고, 이 초록빛은 손목과 흉곽의 에로틱한 질감과 뒤섞이자 조금 밝아졌다. 그리고는 비록 해부학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왼쪽과 오른쪽 각각에 있는 심장으로 이어졌다. 종이의 질감, 감각은 종이에서 출발해 엄지 끝을 지나, 심장으로 흘러 들어갔고, 그녀의 심장은 방향성이 없는 사랑의 감각으로 가득 찼다.

포장은 그냥 뭔가를 덮거나 묶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경험이다. 형식과 내용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는 독특한 경험이다. 그 형식은 평범해야 하고, 포장이 포장으로 남기 위해서는 절대 인상적이거나 화려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그 자체로 ‘뭔가’가 되어 버리니까. 더는 포장이 아니게 되어 버리니까. 그녀는 포장과 자율성이 대립된다고 생각했다. 포장은 일기의 반대인 동시에 특수하고, 규칙에 참여함으로써 만들어진다. 포장은 결코 뭔가로 발전되어서는 안 된다. 서사를 피해야 하고,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다. 포장으로 남기 위해서 그것은 내용을 전개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포장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그것은 ‘무엇’이 되기 어려웠다. ‘무엇’은 언제나 이 세계를 향해 뭔가를 표현하니까. 그렇다고 포장이 아무것도 아닌 것도 아니다. 부재가 아니다. 부재를 통해 존재한다는 말이 있던가? 포장은 거꾸로다. 포장은 존재를 통해 부재한다. 포장은 존재하지만, 방향성을 갖지 않는다. 희한하지, 그녀는 생각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조금이라도 사실이라면, 포장은 존재를 통해 부재함으로써 일종의 자율성을 제시한다. 특이하게도 아무것도 보호할 필요가 없는 자율성.

그녀는 자기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정말 그런 건지, 아니면 포장에 그녀가 바라는 바를 투사하고,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포장 개념을 가져온 건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후자에 가까운 것 같았다.

그녀는 창문을 잠시 잊고 있었고, 창문 밖을 바라보는 자신을 발견했다. 버스는 녹지대를 벗어나 공기관이 많은 지역을 통과하고 있었다. 창문 밖으로 그녀는 줄줄이 늘어선 창문들을 봤다. 그녀의 창문은 움직이고 있었고, 그 너머에 있는 건물의 창문도, 물론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긴 했지만, 그래도 움직이고 있었다. 시야로 하나씩 스쳐 지나가며 연속적인 흐름을 형성했다. 그것들은 몸의 분자 같았다. 수없이 많은 분자로 구성되어 있지만 하나의 전체로 경험되는 몸의 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