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예술에 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새로운 도시에서는, 버스에 타면 창문 밖을 봐야 한다. 확실히 예술이나 예술가에 대해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건 일종의 경험 법칙이다. 일기장에는 예술 얘기 금지. 그녀는 방금 그 법칙을 어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구 어겼다. 일기장에서는 법칙을 위반하기 쉬운데, 어쩌면 그런 위반이야말로 흰 종이 위 줄들이 생각과 인상을 통제하지 않도록 꼭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왜 꼭 뭔가를 떠올리거나,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정확히 밝히기 위해 일기를 써야 한단 말인가? 그녀의 출발점은 반대였다. 그녀는 인상, 도시, 사람들, 만남을 뭔가 그 이상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발생한 일을 확장하기 위해 일기를 썼다. 그 사건들을 의식으로, 더 중요하게는 무의식으로 여과했다. 종이에 얹힌 단어들이 그 자체로 고유한 경험이 될 때까지 색을 칠하고 다른 경험, 인상, 성찰, 사건, 사고와 리믹스했다. 자주적인 형식이 될 때까지. 만약에 일기가 뭔가를 입증하기 위해 쓰는 것이라면 얼마나 끔찍하게 지루할까. “실로, 8월의 24일이었다”라거나 “정정해야겠다. 그날에는 분명 비가 왔다”라거나. 좋건 싫건 일기는 문학이고, 가장 강박적으로 중립을 표방하는 사람이나 진실한 증인에게도 일기는 픽션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마 10대에는 그녀도 그랬던 것 같은데) 뭔가를 극복하기 위해 일기를 쓰는데, 그녀는 미국에서 특히 그런다고 생각했다. 새아빠가 참을 수 없이 싫다거나 케빈한테 차인 이후로 더는 살고 싶지 않다거나 하는, 십 대 딸이 쓸법한 영화적인 일기 말이다. 극복 메커니즘이 되레 그 사람이 완전히 소시오패스라는 증거로 둔갑하는. 오늘날에는 이야기가 좀 다르다. 수 세기 동안 일기장에 등장했던 내용들이 이제는 소셜 미디어나 온라인에 각종 음모론의 형태로 올라온다. 불특정한 고함과 둠 메탈이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다른 곳에서는 일기 쓰기가 장롱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일기를 뭔가를 기억하려고 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순간, 에피소드, 사건에 더는 몰두하지 않아도 되게 자신을 해방하기 위해 쓰는 것. 그녀는 모든 측면에서 자기 글쓰기에 확신이 없었고, 그녀가 끄적이는 글이 자기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내다 버리는 쓰레기장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일기장은 망각을 위한 기계다, 그녀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기계는 주인이 돌아올 때마다 약간 실망한다. 제대로 잊지 못했다는 증거. 그녀는 이런 문장에 매혹을 느끼지 않기 어려웠다. 문장 구성이 좋아서라거나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 내용 때문에. 당연히 잊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잊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야 한다. 내가 어떤 기억을 치워버렸다는 것을 아는 이상, 그것은 여전히 매일 매일 곁에 존재한다. 어떤 협회의 수동적인 구성원처럼, 열정이 식은 지지자처럼. 좀 웃기지 않나, 그녀는 자문했다. 그녀에게 일기는 여러 규칙에 따라 조직되어야 했다. 그런 규칙이 없다면 애초에 쓰지도 않았을 거다. 규칙 없이 쓰는 건 너무 큰 부담이었다. 대체 어디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 규칙들이 만들어내는 제약 덕에 그녀 자신에게도 소유되지 않는 문장을 만들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규칙은 그녀를 자의식으로부터 해방해줬다.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속박되었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해방으로서의 자유였다. 일기는 그녀의 글쓰기를 구속했다. 좀 과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가 만약에 소설을 출판해야 한다면. 아마 필명을 썼을 것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나 마르그리트 뒤라스 같은. 문학 스타 뒤에 익명으로 숨는 편이 아주 신중하게 고른 랜덤한 이름보다 훨씬 더 재밌다. 편집자를 설득하기는 힘들겠지만. 절대 쓸 일이 없는 소설에서 그녀는 어떤 거래를 제안받은 죄수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을 등장시킬 것이다. 리버티와 프리덤은 서로 완전히 다른 자유 개념이다. 일기 쓰기는 그녀에게 리버티를 선사한 것이 아니라, 프리덤을 준 것이었다. 그녀의 리버티를 사실상 모두 앗아갔기에 얻을 수 있는 프리덤이었다. 두 단어를 구분해서 쓰지 않는 언어는 좀 불편하다. 예를 들면 독일어나 프랑스어. 문제는 둘 중에 어떤 쪽이 없는 게 더 괴로울까? 프랑스어로는 프리덤과 리버티가 모두 리버티로 번역되고 거꾸로 독일어에는 프리덤밖에 없다. 고달픈 삶이다. 수년 전, 그녀가 아직 하이힐을 신던 시절, 한 세미나에서 잠재적인 목적지가 없는 글쓰기란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글쓰기는 언제나 독자를 상정하니까. 즉, 글은 언제나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쓰는 거니까. 그 다른 누군가가 설사 자기 자신이더라도. 글을 쓰는 나와 글을 읽는 나는 서로 다른 사람이다. 동시에 두 장소에 있는 느낌인 걸,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에게 이 주장은 명확했다. 독자 없이 글을 쓴다면, 끼적대는 것 이상을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글쓴이만 이해하면 된다면 그 어떤 것으로도 그 어떤 의미든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랜덤한 곡선이나, 선, 점, 동그라미 같은 것으로도 충분하다. 정말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쓰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녀는 생각했다, 글쓴이와 독자는 서로 교체될 수 있다는 귀결에 도달할 것이고, 어쩌면 정신 분열을 진단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이 꽤 많은 편견을 가지고 사는 사람임을 알았다. 일기장이나 공책이 너무 깔끔한 사람들은 정상이 아니다. 까만색 가죽 양장이 된 공책이 책장에 나란히 꽂혀 있는 사람도. 중간을 펼쳤는데 찍 그어진 단어도 없고, 틀린 철자도 하나도 없는 사람. 공책에 모든 그림과 다이어그램과 스케치가 완벽하게 깔끔하고 정교하게 설계된 사람. 그건 아주 깊게 내재된 낮은 자존감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그 심연이 너무도 깊어서 왠지 그 사람을 잠깐 붙들고 힘내라고 말해줘야 할 것만 같은. 아니면 정확히 반대의 사람일 수도 있다. 극단적으로 강한 일념을 가지고 있어서, 미래에 자신의 일기장이나 공책이 대중 앞에 공개되고 우주 전체의 학자, 공룡, 박물관 관람객이 그걸 보며 감탄하게 될 거라는 데에 한 치도 의심이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은 좀 무서운데,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에게 일기란, 설사 완벽하게 방향성을 갖지 않는 글쓰기가 불가능하더라도, 규칙과 규정이 있는 것이었고, 그녀에게 그런 제약으로부터 빠져나와 글을 쓰게 만드는 도전이었다. 그녀에게 주어진 과제는 글을 쓰는 것, 독자도 방향성도 없는 듯이 확신을 가지고 쓰는 것, 하지만 글쓰기의 정확성을 잃지 않으면서 쓰는 것. 생각에 너무 깊게 사로잡힌 나머지, 그녀는 내면의 풍경으로부터 잠시 빠져나왔다. 한순간 그녀는 자기가 도대체 어느 세상에 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머리가 양쪽으로 깜빡이며 시야를 고정할 수 있는 뭔가를 찾아야 한다고 긴급하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좌표 위에 점 찍을 수 있는 기호든 뭐든 찾아야 한다고. 매달릴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기 직전, 어느 찰나의 순간, 그녀는 정체성이 흐릿해지는 것을 경험했고 머리가 쭈뼛 서는 패닉이 찾아왔다. 가슴에 텅 빈 공백이 점점 커지면서, 자신을 식별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정체성이 꽤 빠른 속도로 용해된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녀는 사라지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그 마지막 순간, 자기 존재를 좌표로 고정할 수 있는 사건들을 발견했고, 다시 삶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 뭔가가 그녀의 몸에 남았다. 일기에 집중해 본 결과, 한 사람, 동물, 심지어는 사물의 정체성은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독자나 관객을 상정하며 방향성을 가진다는 사실이 분명해졌고, 그녀는 이 발견에 실망했다. 관객에게 의존할 뿐만 아니라, 독자가 없으면 무조건적으로 순식간에 소멸해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