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언제나 한참 후가 되어서야 일기장을 집어 들었다. 그건 언제나 새로운 도시에서 싫증을 느낄 때쯤이었다. 일기장을 드는 순간은 도시가 더는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 순간과 일치한다. 어제 일이 되어 버린 새로움의 멜랑콜리와 때가 맞지 않는 일기 쓰기의 시간이 같이 흐른다. 시간을 정반대로 이해하는, 매일매일의 두 가지 글쓰기 실천. 도시는 진부함에 갇혀 버려도 적어도 일기장은 활성화된다는 것이 조금 슬프거나 안타까운지 아니면 긍정적인지 알 수 없다. 그녀는 일기를 매일 펼쳐보지 않고 주기적으로 쓰는 것은 더욱 아니다. 적어도 좋은 습관처럼 주기적으로 쓰지는 않았다. 그녀가 습관적으로 하는 것은 일어나고, 오줌을 누고, 이를 닦는 것밖에는 없고 나머지는 늘 유동적이다. 어떤 때는 시계처럼 규칙적이다가도 갑자기 미끄러지고, 잊어버리고, 잊어버린 게 뭐였는지도 모르게 된다. 그녀는 때로는 매일매일 일기를 쓰고, 매일 같은 신문을 읽고, 똑같은 요가 수업을 듣는 사람들이 어딘가 옹졸하게 느껴졌다. 더 나은 일이 그렇게도 없나, 아니면 환상이나 상상 능력이 아예 없는 것일까? 환상과 상상은 서로 다른 것일까. 그건 언제나 둘이었나 아니면 하나였나? 그녀는 방향을 거꾸로 돌려 자기의 변덕스러운 입맛이나, 시류를 따라잡지 못하는 무능력, 피상적인 욕구에 자신을 내맡기지 못하는 것, 삶에 조금의 평범한 일관성도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기의 그런 무능력들이 좋았다. 그런 쪽으로 문제가 있는 게 그 반대보다 훨씬 나았다. 일탈의 여지가 전혀 없는 헌신, 즉흥이 전혀 불가능한 고집. 그런 사람들은 정말 졸렬한 연인일 것이다. 수년간 한 연인에서 다음 연인으로 옮겨가며 그 행위에서 엑기스만 남도록 최적화하는 사람들. 더 별로인 것은 대단히 민첩하긴 하지만 가장 좋을 때 즉흥적으로 놓아 버리거나 이유 없이 갑자기 웃지는 못하는 사람. 아마 이런 부류의 변태성을 가리키는 단어가 있을 것이다. 그녀는 혼자 웃으며, 분명 이런 변태성이 섹스나 인생 전반에서 낮은 자존감을 만들어내는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성적 파트너가 표현하는 그 어떤 변칙이나 실망이나 의심이나 그 비슷한 것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일련의 행위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확인받고 싶은 욕구. 그녀는 자신의 끔찍한 정신분석학적 능력에 감탄했고 본인의 개판인 성생활에 대해 생각했다. 적어도 이 재난은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누가 뭐래도 즉흥성과 놓아 버리는 것은 그녀가 지닌 유일한 에로틱한 재능이었으니까.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벌써 세 번째로 그녀의 머릿속에는 초원과 풀밭과 태양과 바람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걸 즐겼고, 잠시 멈춰서서 서서히 사라지는 쾌감으로 진동하는 몸, 좋은 태풍이 지나간 뒤 바다의 굴처럼 서서히 닫혔던 섹스의 기억을 흡수했다. 그리고는 이 이야기는 반드시 수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스스로 실망했다. 왜 여성의 욕망이나 섹슈얼리티를 다른 사람이 그녀에게 제공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클리셰에 굴복한 것일까? 무슨 신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이 그녀에게 쾌락을 선물해준 것처럼?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감각, 쾌락, 몸, 절정의 주인이었다. 그날 밤은 대단히 좋았고, 심지어는 보름달이 떴을 수도 있지만, 거기에 초자연적인 것은 전혀 없었고, 그저 두 몸과 두 정신이 어느 유예된 한순간 함께 했을 뿐이다. 유혹을 느끼긴 했지만, 이 이야기는 일기장에 쓰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이 이야기를 그 어떤 곳에도, 단 한 번도 쓴 적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한 적도 없었다. 한 적 있나? 육체적인 부분 때문이 아니었다. 상대방이 누군지 밝히지 않겠다는 도덕적인 결심도 아니었다. 어차피 그 사람 이름은 알지도, 기억하지도 못했다. 초원과 풀밭과 태양과 바람과 그곳에서 일어난 일 때문이었다. 그녀의 안식처에 관해서는 써서도, 이야기해서도 안 됐다. 누군가와 공유하는 순간 그것을 빼앗길까 봐 두려웠다. 그녀의 것이어서가 아니라 정확히 그 반대였다. 그녀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비밀로 남겨져야 했다. 그녀 개인의 것이 아니라, 너무도 공공적이고 열린 것이어서. 그것을 누군가와 공유한다는 것은 그 무조건성에 상처입히는 것이었다. 솔직히, 그건 비밀이 아니었다. 뭔가 다른 거였다. 비밀은 공개되면 안 되기 때문에 간직하는 것이다. 초원과 풀밭과 태양과 바람은 그 반대였다. 비밀은 윤리와 관련되어 있고, 윤리는 뭔가를 나누는 것이다. 우리만의 비밀. 저들은 참여할 수 없는 우리의 비밀. 하지만 그녀의 안식처는 그냥 장소일 뿐이었고, 정확히 윤리가 부재했기 때문에 장소로 머물 수 있었다. 이런 장소도, 저런 장소도 아니었고 그냥 장소 그 자체. 그리고 그것은 나눌 수 없었다. 그녀는 그 초원과 풀밭과 태양과 바람에서 혼자였지만, 동시에, 그 일부가 아니라 그 자체였고, 초원과 풀밭과 태양과 바람이 그녀였으며, 그 모든 것은 동시에 전체였다. 비밀은 혼자서는 가질 수 없다. ‘이건 내 비밀이야’라는 말은 혼자가 아니라 어떤 형태든 다른 무언가와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한다. 비밀이 비밀이 되려면 다른 사람과 나눠야 한다. 비밀은 두 명으로도 부족하다. 세 번째 사람이 그 비밀의 존재를 증언해줄 수 있어야 한다. 보초병처럼. 세 번째 사람은 그 비밀이 뭔지 알아서는 안 되지만, 자신이 참여하지 않는 그 비밀의 지킴이가 되어야 한다. 어느 한순간, 그 버스에서, 그녀는 눈을 감고 최근 느꼈던 손길들, 그리고 그렇게 가깝지 않은 과거의 손길들을 떠올렸다. 미래의 손길도 느꼈다. 그녀는 다시 눈을 떴을 때 뭔가 다른 단어들이 종이 위로 기어나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긴 겨울잠을 자고 나서 게슴츠레 땅 위로 올라온 설치류처럼 부드럽게 모습을 드러냈으면 좋겠다고. 새 공책은 아니었다. 전혀 아니었다. 일기장이었고 이미 예전에 그 안에 끄적였던 것들이 있었다. 일기장을 소중하게 다루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니까 정해진 시간에 꼬박꼬박 쓴다거나 표지나 끝에 뭔가 특별한 것을 적는 것은 아니었지만, 결코 여백에 낙서하는 법은 없었다. 자기의 부족한 상상력이나 글쓰기 실력, 혹은 게으름을 아무 그림으로나 대신 채우지는 않았다. 그녀는 공책이나 종이에 아무거나 끄적대는 사람들을 함부로 평가하는 자기 자신을 평가했다. 초에 녹은 촛농 가지고 노는 사람들도 똑같지 않나? 그녀보다 나이가 더 많은 어느 여자 친구가 신비로워 보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했다. 어떤 남자한테 관심이 있으면 그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숫자를 13까지 세라고. 더 오래 셀수록 더 신비롭게 느껴질 거라고 했다. 그녀를 더 원하게 될 거라고. 그 말을 따라서 23까지 센 적이 있었는데 결국 그 남자랑 잤는지 어쨌는지는 잊어버렸다. 숫자를 셀 때, 그 친구는 말했다,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꼬아. 그녀는 눈을 떴고 단어들은 나오지 않았다. 여행할 때는 일기가 그럭저럭 흥미로운 기록들의 저장고가 되기 쉽다. “오늘은 아크로폴리스까지 걸어 올라갔는데, 도착했을 때 너무 지쳐서 전망을 즐길 수가 없었다. 신전이 더 클 줄 알았다.” 이런 식으로. 이런 습관은 디지털 사진의 등장으로 폐기되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글쓰기는 한 사람이 겪는 모험이나 삶을 기록하기 위해 꼭 필요한 방법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이미지를 사용하고, 대체로는 너무 많이 사용한다. 그녀는 그럭저럭 괜찮은 디지털 이미지를 만들 수 있게 된 이래 이미지의 가치가 바뀌었다는 점이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사진이 아날로그였을 때, 그것은 버튼을 누르는 일이었다. 자 거기 서 봐, 아주 좋아, 아 망했네. 그때는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경제적인 선택이었다. 인화를 안하기로 결정하더라도. 오늘날 카메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말하자면 사진을 더 많이 찍으면 찍을수록 카메라는 더 저렴해진다. 고로, 돈을 아끼려면 계속해서 버튼을 눌러라. 기억이 이만큼이나 사진으로 보관되고 기록된다는 건 비극이다. 기억을 글로 남길 때 우리는 이미지를 생성한다. 사진이 아니라 이미지. 그리고 이 이미지들은 그 사건을 찍은 사진보다 훨씬 거대하다. 훨씬 더, 훨씬 훨씬 더 거대하다. 몇 년 지나고 혹시 그때의 기억이 다시 머릿속에 떠오른다면, 그에 관해 다시 글을 쓸 수도 있다. 그러면 새로운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새로운 관점이 포착되고, 다른 층위들이 펼쳐진다. 사진은 상상력에는 안 좋은 소식이다. 사진, 특히 개인적으로 찍은 스냅 사진은, 너무도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꿈꾸는 법을 잊어버려 진짜 어땠는지를 포착하지 못한다. 여행에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경험과 모험과 실수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 최근에 한 전시에서 본 사진 이미지가 떠올랐다. 벌거벗은 여성의 모습이었고, 저속하지 않게 그녀 몸의 전면을 보여주는 누드 사진이었다. 양 젖꼭지와 음모가 모두 카메라에 보였지만 구도가 살짝 대각선이어서 엉덩이는 부드러운 곡선으로 느껴지기만 하고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배 앞에, 곧 얼굴로 들어 올릴 것처럼,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긴 렌즈가 달린 (빈티지가 아니라) 현대적인 카메라였는데, 그녀는 전문가의 태도로 그걸 들고 있었다. 그녀는 그 벗은 몸이 카메라로 보호받고 있었지만 동시에 모든 누드 초상화와 이미지가 내재하고 있는 힘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보는 사람이 이미지 속 여성에게 표현하는 힘. 상대를 볼 수 있는 힘을 통해 상대를 가질 수 있다는 것, 소유할 수 있다는 것. 이 이미지에서 누드 신체가 손에 든 카메라는 무기다. 그녀에게는 보는 사람의 힘을 기록할 수 있는 힘이 있었고, 보는 이의 응시가 갖는 폭력성을 드러낼 수 있는 역능이 있었다. 이 이미지의 여러 층위를 떠올리며 그 모든 걸 일기장에 적었다. 사진작가가 누구였는지, 여성이었는지 남성이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아 난관에 부딪혔다. 만약에 사진작가가 여성이었다면 다르게 기억했을까, 아니면 여성 사진작가라서 잊은 걸까? 그가 멀린 뒤마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다 뒤마는 화가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녀에게 카메라가 등장하는 페인팅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