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가는 도시에서는 어떤 역학이 발생한다. 처음 막 도착하면 걷는 것과 택시가 유일한 이동 수단처럼 느껴진다. 그녀는 운전을 못 했기 때문에 택시를 애용하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다. 대체로 택시를 탈만큼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그 서비스를 실컷 이용했다. 어쩌면 이게 암스테르담이 싫은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암스테르담에서는 (사실 암스테르담을 도시로 인정하기는 어렵지만, 또 마을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편안한데) 택시가 옵션이 아니다. 너무 비싸니까. 그녀는 첫날부터 예외 없이 그 형편없는 도시를 걸어서만 다녔다. 물론, 가끔은 트램을 타기도 했지만 그건 현지인이나 거의 현지인인 사람과 같이 있을 때였다. 한번은 매일 아침에 중앙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야 하는 호텔에 머무른 적이 있다. 그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싫었고 참고로 이 호텔은 디자인 호텔 같은 거였는데, 방이 지나치게 작았고 유리 칸막이로 샤워실과 나머지가 구분되어 있었다. 그 나머지가 뭐였건 간에. 또, 매일 아침 조식 뷔페에 가야 하는 건 몹시 굴욕적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너무 환상적으로 좋지만, 호텔 경영진들은 이미 숙박객들이 다 알아차렸다는 것을 정말 모르는 걸까? 조식 뷔페가 돈이 더 적게 들지만, 더 비싸고 풍성해 보인다는 것을. 조식 식당은 가장 꼭대기 층에 있다는 장점이 있었고 호텔의 뷔페 담당 부서는 이곳에서 비즈니스호텔과는 어딘가 다른 사회적 맥락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여전히 좋지는 않았는데 조금이라도 늦게 가면 모든 게 약간 끈적끈적해져 있었고 병에는 오렌지잼이 묻어 있었다.

처음 가는 도시에서는 택시비가 매일 쓰는 돈의 절반은 차지하는 것 같지만 택시 안에서는 삶이 안전하고, 여러 층위의 현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 여정은 사라지고 목적지가 전부가 된다. 택시는 순간이동의 원시적인 버전인데 대신 따뜻하다. 그녀에게 순간이동은 어딘가 몹시 추운 경험처럼 느껴졌다. 우주를 통과한다니 정말 추울 것이다. 몸이 서로를 덥혀줄 수 없는 각각의 미세입자로 일시적으로 분해되는 것으로도 모자라 완전히 나체가 되어야 한다니. 그래서 순간이동하고 나서 몸을 다시 조립하고 나면 가장 먼저 따뜻한 차를 마시는 걸지도 모른다.

택시를 타면 여기와 저기만 있고 그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반면에 걷기는, 특히 관광일 경우, 정반대다. 대부분 목적지를 염두에 두지 않고 도시를 탐험하면서 그때그때의 상황을 가이드 삼아 걷는다. 걸을 때는 조건이 반대가 되어 오직 여정만이 중요해진다. 지금 여기가 전부가 되고, 각각의 여기는 고유하지만, 그것들을 분간하는 일은 서서히 불가능해진다. 여기는 어디든 될 수 있고 묘하게 다 똑같다.

안전이나 목적지는 없지만, 여행자는 도시의 질감을 경험할 수 있고, 골목 술집에서 이야기를 엿들을 수도 있고, 쓰레기 냄새를 맡거나, 루이뷔통 가방을 주지는 않지만 엄청나게 싼 가격에 수많은 서비스를 권하는 사기꾼을 만날 수도 있다. 손님한테만 이 가격에 드리는 거라면서. 하지만 문제는 10분 정도 지나면 모든 것이 똑같이 느껴지고 열의를 계속 갖기 힘들다는 것이다. 우리는 알아볼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가치를 느끼니까. 그래서 처음 가본 도시에서 보내는 둘째 날은 언제나 집보다도 좋다. 물론 첫날도 신나긴 하지만, 그래도.

걸어서는 절대 훌륭한 식당을 찾을 수 없다. 결국에는 이미 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 아는 것들을 조합해서 만든 약간 한심한 음식을 먹게 될 것이다. 음식에 관해서 만큼은 집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점점 더 보수적으로 된다는 게 좀 이상하지 않나?

“내가 먹은 게 알고 보니 닭발이었다거나, 맙소사, 내장이나 전통 피순대 같은 거면 어떡해. 마르게리타 피자나 햄버거나 치킨을 먹는 게 낫겠어.” 집에 있을 때는 실험적인 요리를 잔뜩 먹어놓고는, 메뉴를 읽을 수 없는 곳에만 가면 내면의 전통주의자가 기어나와 정상성에서 벗어난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대비한다.

잘 모르는 도시에서 비로소 그 질감의 일부가 되는 것은 버스를 탈 때다. 아니, 버스를 탈 때 그 도시는 더는 낯선 것이 아니게 된다. 그렇다고 이제 지하철도 탈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 어떤 도시에서는 물론 그 순서가 반대인 경우도 있다. 이 순서는 언제나 명확하고 모호한 경우는 없다.

그녀는 어쩌면 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노래 가사들을 좋아했다. 노래 가사가 불확신을 표현한다는 건 이상한 현상이지만, 어딘가 아주 평범할 정도로 아름다운 데가 있다. 그녀는 무엇이 두려운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 감각은 떠날 줄을 몰랐다.

마침내 새로운 도시에서 두려움 없이 버스에 올라탈 수 있게 되었을 때 경험하는 감정은 굉장히 강렬할 수 있다. 그녀에게 그것은 강력한 힘, 독립의 감각과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여기서 힘은 권력이나 다른 사람에게 행사할 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조차도 막을 수 없는 그런 힘. 축적하는 힘이나 자본의 힘은 독립과 병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힘은, 거래 계약에 서명한 적도 없는데, 독립을 감시나 편집증과 맞바꾸는 것이었다. 독립은 아무 수단도 동원하지 않고 힘을 갖는 것이었고, 그녀는 버스에 올라탔을 때 그런 힘을 느꼈다. 특히, 이번에 그녀는 일부러 전략적으로 이어폰을 꼈고, 버스에 탑승하는 바로 그 순간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하우스 비트의 음악이 나왔다. 카푸치노를 연상시키는 하우스 음악.

버스는 텅 비어 있지도 않았지만, 꽉 찬 것도 분명 아니었다. 누군가 그녀를 밀치고 버스에서 내려야 하지도 않았고, 그녀가 그 나라 말이 아닌 언어로 사과해야 하는 일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느꼈던 힘의 감각은 온전히 유지되었다. 그녀는 버스 뒤를 향해 걸어갔지만, 앞의 도로는 활짝 뚫려 있었고 미래는 벌거벗은 채 그녀 앞에 놓였다. 역설적인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힘이 있었고 일정한 카푸치노 비트가 나왔으니까. 어쩌면 (노래 가사의 어쩌면 말고) 그녀가 느낀 독립의 감각은 아무도 아닌 느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느낌과 연결되는 것 같았다. 익명이 되는 것, 그렇다고 존재가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니라, 재현되지 않는, 군중의 일부가 되지 않는 감각.

파란색 시트가 씌워진 좌석에 앉았다. 여러 종류의 파란색이 뒤섞여 있었는데, 모든 걸 좋게 좋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디자인된 거로 생각했을 거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오늘은. 참 이상하게도 어딜 가나 버스와 지하철 좌석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것들만 빼면, 언제나 디자인이 이상하고 너무 많은 색깔과 채도가 뒤섞여 있다. 아마 그 불규칙한 패턴이 오염물을 가려주기 때문일 것이다.

숨을 들이마시며 그녀는 익명성과 자주성은 교환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그럴까? 관계가 형성되는 방식에는 약간의 트위스트가 있다. 서구 사회에서 자주성은 자유주의와 같은 의미다. 사람들이 자주성이라고 할 때, 그건 결코 진짜 자주성이 아니거나 온전한 자주성이 아니고 언제나 권력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자주 국가라는 말처럼 자주성이라는 개념에는 혼선이 있다. 자주적이려면 자체적인 규칙과, 어쩌면 통화 시스템과, 당연히 국경이 있어야 하지만, 그럼으로써 언제나 다른 무언가와의 관계 속에 놓이게 된다. 그건 반응으로서의 자주성이다. ‘저거 싫어’로서의 자주성. 미국의 ‘사유지 출입 금지’ 같은 것. 이런 자주성이 어떻게 독립성과 같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자주성은 위선적이다. 주변이 친절하고 우리가 자신을 보호할 수 있을 때만 성립되는 자주성. 이런 자주성은 파괴하거나, 정복하거나,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을 되레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일종의 가미카제와도 같다. 바깥을 향해 ‘저건 적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역으로 뭔가 이곳에 침략하거나, 정복하거나, 훔칠 것이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익명성은 그렇지 않다. 익명성은, 적어도 그녀의 익명성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가치를 갖지 않는 것이다. 아무 소유권도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정복될 수 없는 것. 거의 평행우주처럼, 우리 곁에서 함께 걷고 있는데 우리는 그 존재조차 모르는. 진짜 독립성은 그 어떤 것도 잃을 것이 없다는 의미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도. 자기 자신도 이미 소유물의 한 형태이니까.

이건 정확히 그녀가 그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경험했던 것이었다.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아 초원에서, 풀밭에, 태양과 바람 속에 몸을 뉘었던 때 말이다. 그 순간 그녀는 독립적이고, 자주적이고, 익명적인 그 모든 것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아니, 그녀는 그날 밤 자신이 영원히 변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변화라고 하기에는 더 지독하고 더 끔찍했다.

그녀는 서핑을 떠올렸다. 한 친구는 서핑 보드 위에서 처음으로 일어서는 순간은 모든 이성의 영역을 뛰어넘는 경험이라고 말했다. 불가능한 무언가의 일부가 되었다는 절대적인 가속과 깨달음. 완벽하게 비이성적인 무언가의 일부.

서퍼들은 남은 일생 그 불가능성을 다시 경험하기 위해 파도를 좇는다. 서퍼들이 다음 파도를 기다리며 앉아 있을 때, 그들은 그 순간을 애도하고 있는 것, 그 경험을 영원히 다시 하지 못할 것이라는 깨달음을 유예하는 것이다.

그녀도 저 나름의 서퍼가 된 것일까.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풀밭, 태양, 바람과 하나 되었던 그 감각을 애도하는 것일까. 그 모든 것이 함께이자 하나였기 때문에, 그녀가 풀이고 풀이 그녀였고, 그 모든 것이 동시에, 영원히 전체 그 자체였기 때문에?

갑자기 패닉이 찾아와 그녀는 그 낯선 사람이 사탄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녀는 저주받았고, 상실의 감각을 평생 지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내면이 텅 빈 채로 계속해서 살아야 할지도. 비었다는 건 유리잔이 비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까, 아니면 텅 빔으로 가득 찬? 그건 너무 존재론적인 얘기였고, 그래서 그녀는 그냥 버스 타는 것에 집중했다. 버스가 몇 번이나 정류장에 멈췄는지 알 수 없는 채로. 이 멈춤들은, 어쩌면, 정지가 아니라, 휴지, 계속 이어가기 위해 필요한 유예의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처음 가는 도시에서는 어떤 역학이 발생한다. 처음 막 도착하면 걷는 것과 택시가 유일한 이동 수단처럼 느껴진다. 그녀는 운전을 못 했기 때문에 택시를 애용하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다. 대체로 택시를 탈만큼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그 서비스를 실컷 이용했다. 어쩌면 이게 암스테르담이 싫은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암스테르담에서는 (사실 암스테르담을 도시로 인정하기는 어렵지만, 또 마을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편안한데) 택시가 옵션이 아니다. 너무 비싸니까. 그녀는 첫날부터 예외 없이 그 형편없는 도시를 걸어서만 다녔다. 물론, 가끔은 트램을 타기도 했지만 그건 현지인이나 거의 현지인인 사람과 같이 있을 때였다. 한번은 매일 아침에 중앙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야 하는 호텔에 머무른 적이 있다. 그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싫었고 참고로 이 호텔은 디자인 호텔 같은 거였는데, 방이 지나치게 작았고 유리 칸막이로 샤워실과 나머지가 구분되어 있었다. 그 나머지가 뭐였건 간에. 또, 매일 아침 조식 뷔페에 가야 하는 건 몹시 굴욕적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너무 환상적으로 좋지만, 호텔 경영진들은 이미 숙박객들이 다 알아차렸다는 것을 정말 모르는 걸까? 조식 뷔페가 돈이 더 적게 들지만, 더 비싸고 풍성해 보인다는 것을. 조식 식당은 가장 꼭대기 층에 있다는 장점이 있었고 호텔의 뷔페 담당 부서는 이곳에서 비즈니스호텔과는 어딘가 다른 사회적 맥락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여전히 좋지는 않았는데 조금이라도 늦게 가면 모든 게 약간 끈적끈적해져 있었고 병에는 오렌지잼이 묻어 있었다.

처음 가는 도시에서는 택시비가 매일 쓰는 돈의 절반은 차지하는 것 같지만 택시 안에서는 삶이 안전하고, 여러 층위의 현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 여정은 사라지고 목적지가 전부가 된다. 택시는 순간이동의 원시적인 버전인데 대신 따뜻하다. 그녀에게 순간이동은 어딘가 몹시 추운 경험처럼 느껴졌다. 우주를 통과한다니 정말 추울 것이다. 몸이 서로를 덥혀줄 수 없는 각각의 미세입자로 일시적으로 분해되는 것으로도 모자라 완전히 나체가 되어야 한다니. 그래서 순간이동하고 나서 몸을 다시 조립하고 나면 가장 먼저 따뜻한 차를 마시는 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