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걷자.”

“어디 가는데?”

“딱히 정한 건 없어. 왜 꼭 정해야 해, 그냥 걸을 수는 없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같이 걷자고 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왜? 네 곁에 있는 게 좋다는 이유만으로는 부족해? 어디 가는지를 알면 알수록 네 곁에 있어서 좋다는 느낌이 희석되는걸.”

“그럼 애초에 왜 걸어, 그냥 앉아 있기만 해도 좋겠네. 걷다 보면 결국 불평이랑 물집으로 가득 차서 즐거움은 다 사라질걸.”

“너는 물집이 잘 생기는 사람도 아니고, 여기 앉아 있어도 불평은 똑같이 할걸? 지금처럼 햇볕이 뜨거울 때는 더 그렇지.”

“내가 물집이랑 어떤 관계인지 알기나 해?”

“그거 말고도 냉장고나 핸드폰이나 그밖에 소소한 수많은 것들이 우리 대화에 끼어들 수 있고.”

“있잖아, 내 어린 시절은 끝없는 물집들의 연속이었어. 열 발가락이 맨날 물집으로 터졌지. 발꿈치도. 양쪽 다. 어떤 때는 엄마가 신발 끈을 너무 꽉 묶어서 끈이 피부를 파고들었고 결국에는 또 물집이 잡혔어. 이제는 양발에 전부 굳은살이 박였는데, 대학 졸업할 때까지 매일 하이힐을 신었더니 엄청나게 커졌어. 이제 양말만 신어도 물집이 생겨. 젠장. 내 발은 그 물로 가득 찬 끔찍한 것들이랑 온갖 고통에 너무 많이 노출돼서, 걷자고 말한 너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래. 그럼 이제 가자.”

“가방만 가지고 올게. 반창고 챙겨야 해.”

“반창고는 왜?”

“혹시 모르니까. 사고가 생길 수도 있잖아. 반창고는 보험 같은 거니까. 아무 일도 없겠지만. 나쁜 운이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막아주거든.”

그녀는 도대체 뭘 입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여행길에 너무 오래 있었던 것 같았고 가져온 옷들은 깨끗하긴 했지만 백 번 대 케이블 채널에서 나오는 재방송처럼 느껴졌다. 안 그래도 그는 그녀가 뭐가 됐든 짐을 너무 많이 가져왔다고 불평하고 있었다. 덩치가 그의 절반밖에 안 되는 그녀가 짐은 두 배로 가져왔다. 그중에서 다시 입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의 옷을 빌려 입을 수도 있었다. 허리가 너무 높고 벨트 스트랩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걸프렌드 진 같은 것 말이다. 그러기에는 허리가 맞지 않았다. 아마 그가 보면 한참을 웃고는, 눈을 굴리며, 그래그래, 맘대로 해, 잘나 보이고 싶은 기분이면 뭐든 빌려 가, 그렇게 말할 것이다.

수년 전, 그녀는 낯선 사람과 사랑을 나눈 적이 있었다. 특별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평범했다는 것이 아마 가장 적절한 표현일 테고, 그건 섹스인 동시에 또 완벽히 다른 무언가였다. 그녀의 신경은 모두 표면으로 몰렸고 필사적으로 민감했다. 그들은 처음이었지만 안전한 기분이 들었고 부드러운 전개 덕에 그녀는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 절정에 올랐다. 그녀는 눈을 감으며 간청했다. “안 돼… 제발… 더는 못 해. 더 하면 죽을지도 몰라.” 하지만 비자발적인 수축이 밀려들며 헐떡이는 숨 사이로 세 번째인가 네 번째 오르가슴이 찾아왔다. 공동의 열기 속에서 그 절정은 그녀가 시트를 정신없이 긁어댈 때까지 이어졌다.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질감, 무게, 손길. 그건 냇가에 앉아 물이 어둡게 반짝이는 것을 보는 것, 반사된 빛이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과 같았다. 그녀는 그 순간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거나, 뭘 제공하거나 만족시키려고 노력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안에 존재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느릿한 파도처럼 차분한 무관심이 그녀를 뒤덮었다. 아이였을 때의 기억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모든 압박과 혼란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 모든 것이 용해되어 사라졌고, 가뿐한 기분이 들었다. 몸이 어떤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것 같았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그녀가 아주 잘 아는 곳. 그곳은 화창하고 고요했고, 풀잎이 그녀를 둘러쌌고,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와 풀잎과 태양이 모두 하나가 된 것 같은, 같은 것의 일부가 된 것 같은 기분. 그녀는 전체 중 일부였다. 전체의 흐름 속에 있었고, 그 안에, 그 바깥에, 뒤엉켜 같은 것이 되어갔다. 그녀가 도달한 곳은 풀밭, 흐르는 움직임…시냇물이나 강물, 어쩌면 키 높은 풀밭에서 파도치는 바람, 산들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의 반짝임, 우아하게 흐르는 구름.

그 후 그녀는 천천히 내려왔다. 그녀의 아우라를 쓰다듬는 손길 아래, 반복된 오르가슴에 지쳐 떨리는 엉덩이, 배, 허벅지의 근육이 서서히 식었다. 그녀는 베개 더미에 누워 살갗이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아침이 되자 다른 몸의 흔적은 희미해져 있었다. 정사의 냄새나 브리짓 존스 특유의 성교 후 지저분한 머리는 없었다. 그녀의 몸은 차분했고, 피부는 투과성이 높아졌고, 기분은 가벼웠다. 이 경험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었고, 비인격적인 것들이 그 가벼움을 채웠다. 무적이 된 것 같은 느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