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자리에 앉았다. 그다지 아늑한 방은 아니었다. 크지도 작지도, 분명히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았다. 딱 그런 부류의 장소에 걸맞은 크기였다. 정통성을 강조하는 특이한 건축적 요소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이 완벽하게 평범한 방이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건 홈메이드였고, 매 순간 전통이 좋다고 말하는 이야기들이 이어지는, 그런 장소였다.

그녀는 마주 보고 앉는 전통적인 구조에 회의적이었다. 공간만 두고 보면 효율적일 수 있지만 그밖에 또 다른 이유가 있을까? 말이 안 된다. 맞은편에 앉는 것은 대립적이기도 하고 그날 저녁 식사가 결혼이나 이혼처럼 뭔가 근본적인 것을 결정해야 하는 자리처럼 느껴진다. “다 집어치우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맞은편은 좋은 시작이 아니다. 아니, 식당에서는 나란히 앉아야 한다. 무엇보다 민망한 침묵을 극복하기에도 이 구조가 훨씬 낫다. 나란히 앉으면 다른 손님이나 길거리 행인들을 관찰하고 그들에 대해서 떠들 수도 있고, 아름다운 가을 노을을 물끄러미 볼 수도 있다.

같은 편에 앉으면 절대 어색해지지 않는다. 나란히 앉으면 웃기도 쉬워질 뿐더러 몸과 몸 사이의 가까운 거리가 민망한 침묵을 쓸어내기 때문이다. 테이블 한편에 같이 앉는 건 대립이 아니라 협정이고 테이블은 우리를 바깥으로부터 살짝 보호해준다. 나란히 앉으면 닫힌 공간이 아니라 초대의 공간이, 열림의 제스처가 생겨난다. 나란히는 너와 나 사이에 사적인 영역을 조성하는 대신 작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적인 공간을 만들어 낸다. 맞은편은 결과를 예측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전략이 존재하는 일종의 게임이 된다. 체스나 바둑은 언제나 맞은편에 앉아서 시작한다. 참가자들이 나란히 앉는 보드게임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란히는 게임을 포기하고 놀이를 강조한다. 결과도 없고, 동의해야 할 것도 없고, 정복해야 할 필요도 없다.

어쩌면 그래서 자동차에서 나누는 대화가 그토록 만족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자동차가 남자들이 말을 주고받는 몇 안 되는 장소인 것도 그 때문이다. 남자들이 유일하게 대립적인 교류 방식 대신 서로 대화를 나누는 장소.

상대방을 바라봐야 한다는 의무감 없이 함께 이야기하는 건 아름다운 일이다. 아이 컨택 없이 나누는 대화. 맞은편에 앉았는데 상대방을 쳐다보지 않는다는 건 거의 확실히 바람을 피웠거나 다음에 여행 가려고 모아뒀던 돈을 도박으로 탕진했다는 거다. 맞은편에 앉아서 하는 모든 신체적 접촉은 추파로 느껴지거나, 상대의 손에 손을 올린 채 “널 많이 아껴” 따위를 내뱉는 촌스러운 접근이 되기에 십상이다. 나란히는 훨씬 더 역동적이다. 어깨를 가볍게 주먹으로 칠 수도 있고, 머리를 맞대고 작당 모의를 하거나, 서로의 귀에 속삭일 수도 있고, 대담하고 금지된 관능을 나눌 수도 있다.

우리가 키득거릴 수 있는 것은 나란히 앉을 때다. 나란히 앉을 때 웃음이 우리를 하나로 모아준다. 맞은편에 앉은 이들은 거래를 성사 시키거나 세력을 연합한다. 나란히 앉은 이들은 우정과 신뢰와 바로크적인 음모 사이 어딘가에서 손을 잡는다. 나란히는 얕은 물의 영역이다.

해변에서 두 여인이 바닷물에 몇 미터쯤 들어가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 이야기를 나눈다. 햇살이 수면에 반사되고, 특별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란히는 뭐가 누구 것인지 알 수 없게 되고 대화가 풍경이 되는 곳이다.

남자들이 함께 웃을 줄 모른다는 건 어딘가 비극적이다. 이런 구분이 과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누군가를 향해 웃는 것과 누군가와 함께 웃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물론 아주 많은 예외가 있지만, 레스토랑처럼,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다. 남자들, 특히 자기 정체성을 혈통에 의거해 경험하는 부류의 남자들은 위에서 아래로 웃는다. 동료 인간의 실수나 결점이나 부족함을 향해 웃는다. 억압하고 비하하는 웃음이다. 서로 맞은편에 앉아 마주 보고 있는 사람들의 웃음이다. 웃는 능력, 진짜로 웃는 능력을 상실하거나 빼앗긴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은 지독히 슬프다. 적어도 유럽 남자들에게 웃음은 권력과 분리될 수 없다. 특히 부다페스트보다 서쪽에서 태어난 이성애자 백인 남자들에게는. 분리하는 웃음, 그 저류에 두려움이 흐르는, 부케에 사디즘이 진동하는 웃음.

그녀는 한 친구를 떠올렸다. 이제서야 어떤 깨달음이 급격한 멜랑콜리아와 더불어 찾아왔다. 그 친구는 수년 전부터 웃지 않았다. 그녀는 웃음을 그만두기 이전의 그를 알지 못했다. 그가 자기 웃음소리나 고르지 않은 치열이 부끄러워 웃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웃음을 손으로 가리는 것은 벨기에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전유물이다. 그는 웃음이 바닥난 것도 아니었고, 지루한 것도 아니었다. 오만해진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어느 날 그냥 멈춰버렸다. 웃음은 더는 그의 일부가 아니었다. 그는 미소를 지었고 행복하고, 사회적이고, 활달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누구나 머지않아 그가 웃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다른 사람이 웃는 것을 좋아했고 많은 사람을 웃게 했다. 누군가는 그가 웃긴다고 했고 누군가는 그의 유머 감각을 대단히 좋아했지만 그는 결코 함께 웃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그의 외로움과 체념이 느껴질 때면 눈물이 차오를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특히 그가 웃음의 원천인 상황들에서.

그녀는 여태껏 그게 상처, 트라우마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녀는 갑자기, 여러 해가 지난 지금에서야,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트라우마는 있었지만, 상처는 없었고, 어쩌면 그게 더 슬펐다. 그건 저항의 한 형식이었다. 어쩌면 비자발적인 저항. 방향성을 갖는 웃음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거부. 목적을 갖는, 혹은 더 단순하게는, 다른 사람을 빌미로 발생하는 웃음에 대한 저항.  결국은 함께하는 웃음을 끝까지 고집할 만큼 강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비탄에서 비롯된 트라우마였을 수도 있다.

흰 벽이 원목 테이블과 더 어두운 채도의 의자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어쩌면 귀족적으로 높은 방의 층고와 어울리도록 사람들을 너무 바르게 앉게 만드는, 등받이가 아주 높은 의자들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녀의 어머니는 어두운 불빛 아래 식사하기를 고집했는데, 그녀는 그게 짜증이 나지는 않았지만 늘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녀는 큰 창문이 난 피자 가게에서 마음이 제일 편했고, 특히 직원들이 느긋해서 피자 서빙을 무슨 경기처럼 생각하지 않는 곳이 좋았다.

그녀는 자리를 뜨고 싶었다. 메뉴판을 받기도 전에. 그냥 거기서 나가야만 했다. 장소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 모든 것이 어디에 이르렀는지에 대한 깨달음이 허를 찔렀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는 방. 지나치게 균일하게 놓인 테이블들. 메인 코스가 끝나고 화장실에 가려면 테이블 사이를 꼬불꼬불 지나야 하는 구조. 거친 척하는 웨이터들의 핏이 맞지 않는 조끼. 적어도 파리의 웨이터들은 모든 것을 익명으로 남겨 두는 품위라도 있다.

“여기 되게 개인적이다.” 사람들은 그게 좋은 것처럼 말한다. 우리 부엌으로 당신을 초대할게요. 온 김에 내부의 분란도 보세요. 아 맞다, 우리 가족은 삼대째 여기서 음식을 만들고 있어요. 내가 식당에 오는 이유는 밥을 먹기 위해서지 어느 다큐멘터리에 엑스트라로 출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마치 음식을 요리사의 성격이나, 가족 간 원한이나, 몇 대째 내려오는 레시피로 양념하면 그 퀄리티가 올라가는 것처럼 생각한다. 기억이 닿기 전부터 대대로 내려오는 요리라면 훌륭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처럼. 그 모든 건 그곳이 끝내주게 더럽다는 사실, 요리사가 메뉴를 바꾸기에는 너무 겁쟁이라는 사실, 독립하기에는 너무 의존적인 아들이라는 사실을 가리기 위한 연막에 불과하다. 레스토랑은 심각하게 신경증적인 환경이다.

어쩌면 세계화라는 말이 발명되기 전 어느 시점에는 개인적이고 소박하고 정통성 있는 것들이 쓸모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인터넷이 있기 전에 현지 스페인 타파스바에 가는 건 투우 경기와 알모도바르의 세계에 살짝 빠져보는 경험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민족국가라는 시대에 뒤떨어진 개념을 왜 밥 먹을 때만 되면 고집하는 걸까? 여하튼. 개인적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서로 완전히 똑같이 느껴질 때면 좀 묘하다. 물론 모든 개인적인 것이 바로 유통될 수 있는 상품으로 둔갑한 오늘의 사회에서 이상한 일은 전혀 아니지만 말이다.

그녀의 친구들도 나가고 싶은 걸까? 특별히 괴로워하는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래도 그녀가 물어보지 않으면, 사실은 아무도 원치 않았던 저녁 식사 자리에 있느라 모두가 고통받을 수도 있다. 또 대부분의 사람은 어차피 저녁을 먹으니까 별 대수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저녁일 뿐이니까. 무슨 축하 파티도, 기념일도 아니고, 단순히 저녁이니까. 그녀는 편하게 앉았고, 척추와 등받이의 관계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정신은 그녀를 대신해서, 나란히 앉으면 ‘단순한’ 저녁이야말로 딱 맞는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맞은편은 조사이자 멈춰서서 하는 성찰의 시작이다. 나란히는 시야를 들어 올리는 것에 더 가깝다. 우리를 우리로 만드는 모든 성찰들의 연속과 받아들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