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좌석에서 들리는 불평스러운 중얼거림. 우리 대체 언제 도착해? 중간 지점까지만 해도 진전이 있는 것 같은데, 그 중간을 넘어서는 순간부터는 목적지가 계속해서 뒷걸음질 치는 느낌이다. 더 멀리 여행하면 할수록 여행의 끝은 점점 더 멀어진다. 여행자들은 종착지가 눈에 보이는 순간에서야 비로소 안심하고, 숨을 내쉬고, 도로 위 긴장을 떨칠 수 있다. 그때까지 거리는 언제나 나뉘고, 남겨진 절반은 언제나 멀다. 여행이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정의상 언제나 시작과 중간, 끝이 있고 우리는 영원히 그 중간에 머무는 것 같기 때문이다. 중간이 좋은 경우는 오직 그것이 시작 뒤에 딸려오지 않을 때와 끝을 피할 수 있을 때다. 방향성에 붙들린 중간은 결코 충분한 중간이 될 수 없다.

그녀는 삶을 여행이나 길로 이해하는 한, 나이 든다는 것은 언제나 더 적은 미래를 갖게 되는 것과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젊은 사람은 기대할 수 있는 미래가 더 많다. “난 너무 늙었어”라는 선포는 사라지는 미래에 대한 애도이다. 어느 시점이 되면 과거가 한 사람의 미래를 따라잡는다. 미래가 뒤로 밀려나는 경험을 안고 살아간다는 건 외로움을 잘 견뎌내는 일과 같다.

길은 여행자에게 방향이 맞았는지 틀렸는지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위안을 준다. 여행 중에 경로에서 이탈할 경우, 언제 이탈했는지를 되짚어보고 식별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길은 안전한 느낌을 준다.

“여기 어딘지 알겠네”라는 말은 일종의 멜랑콜리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있는 곳은 다른 어떤 곳도 아닌 바로 여기라는 생각. 어디인지 모르는 곳에 대해 기대치를 갖기는 어렵다. 여행을 길로 생각할 때 뒤를 돌아보지 않기는 어렵다. 사람들은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아는 건 중요하다”라고들 말한다. 정말 그럴까? 그녀는 일본 정원이 되고 싶었다. 누군가의 갈퀴질로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그런 정원. 갈퀴질하는 사람들은 이름이 없다. 아, 프랑스만 빼고. 프랑스에서 갈퀴를 든 사람들은 전부 이름이 피에르다. 일본 정원은 비대칭적으로 뒤엉킨 불완전함들, 그 어떤 과거도, 근원도, 기대도 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불완전함들로 직조된다.

그녀는 갑자기 좌석 등받이와 자기 몸 사이에 생겨난 압력을 자각했다. 한 사람이 거의 전적으로 그의 과거에 의해 정의된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사람이 편하게 쉴 때면 몸을 뒤로 기대게 되고, 그렇게 기대면 압력의 방향이 달라져 척추가 좌석 등받이를 밀게 된다. 그 변화는, 그녀가 투사한 것일 수도 있지만, 역사의 소유물이었던 사람이 그 역사를 소유하게 되는, 일종의 소유권의 변화처럼 느껴졌다. 자신감이 있다는 것과 자신의 역사를 소유한다는 것은 같은 말이다. 그녀는, 그 경험이 싫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표방하는 역사와 소유권 간의 가까운 거리를 도통 좋아할 수가 없었다. 역사가 사적으로 소유될 수 있다는 자각은 영 싫은 느낌을 줬다.

먼저, 내 역사는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다.그건 복잡하게 교차하는 특수성들이 짜증 날 정도로 뒤죽박죽 섞인 것이라 절대 곧게 정리될 수 없다. 둘째, 나라는 개인이 특출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과거를 강요하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족보나 혈통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역사를 원시적으로 이해하는 가여운 이들이다.

어느 해변, 옷을 과도하게 차려입은 한 노신사가 손에 든 금속탐지기의 소리. 전체적으로 랜덤한 것치고는 꽤 마음을 끈다. 소리의 주파수를 높이는 것은 대상과의 거리이지, 나이나 혈통이 아니다. 헌신적인 고고학자가 숭배하는 것은 대지이지 그 안에 숨겨진 것들이 아니다.

발견들은 얼굴의 애교점처럼 전체를 더 매력적으로 만든다. 고고학자가 뭔가를 발견하거나 발굴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발견될 수 있도록 대지가 허락하는 것이다. 흙은 이런저런 것들을 표면으로 밀어 올리고 고고학자를 그곳으로 인도한다. 이 발견들에는 어딘가 흥미로운 점이 있다. 고고학자의 일은 뭔가를 발견하는 것일까, 아니면 목격하는 것일까? 고고학이 뭔가를 발견하고 땅에서 추출하는 것이라면 그 실천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생산 방식을 재생산한다. 이때 고고학은 도둑질로 둔갑하고, 경제와 영광의 문제가 되고 만다. 하지만 고고학이 뭔가를 목격하는 것이라면, 고고학자는 돌보는 사람이자 손님을 맞이하는 사람이 된다. 돌보는 사람은 자식이 행복하고, 안전하다고 느끼고, 자신감을 얻고, 수영하는 법을 배우고, 공부를 잘 할 수 있도록 보살피는 부모와는 다르다. 목격자이자 돌보는 사람의 정체성이 부여된 고고학자는 특정한 이유로 돌봄을 수행하거나 그에 대해 대가를 바랄 수 없다. 목격자는 익명이고, 이런 형태의 돌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누구의 편에 서지 않을 때 진정한 관대함이 발생하고, 용감한 자만이 과감히 무관심할 수 있다.

대체 데이트 상대를 왜 연극 공연이나 콘서트에 데려가는 걸까? 그녀는 누군가를 초대해놓고 둘이 나란히 앉아 거의 아무런 교류도 하지 않는 것이 좀 괴이쩍다고 생각했다. 공연이 마음에 든다는 시선을 보내면 거기에 공감하는 작은 끄덕임만이 오가는 시간. “그래도 공연 끝나면 할 말이 좀 있겠군.” 언어 교환을 하기 위해서 극장에 가는 것이라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데이트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럼 세 번째나 스물한 번째 데이트는? 그때도 극장에 가서 연극 한 편을 보고 나서야 대화가 가능하려나. 이상한 역할 놀이가 아닐 수 없다.

그녀는 이번 여행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놀랐다. 함께 나누는 경험, 함께 나누는 여행이 더 낫다는 압박에 굴복한 것일까? 동반자 없이 혼자 하는 여행은 어딘가 부정적이라고 여겨진다. 혼자 여행하는 사람은 친구가 없는 사람, 다들 싫어해서 아무도 같이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없는 모험은 정말 구리다고 다들 합의한 것 아닌가? 혼자 하는 여행은 진짜 여행이 아니라, 순례나 과제처럼 여겨진다. 할리우드 코미디에서 남편의 유골을 어딘가 특별한 장소로 가져가야 하는 어느 나이 든 여자나, 모두 털어버리려고 떠나는 사람의 이야기.

나는 극장에 다른 사람과 같이 가고 싶지 않다. 내 주의력의 절반은 친구가 실망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데 쓰이고, 다른 절반은 우리가 한 경험에 관해 뭔가 지적이면서도 색다른 해석을 생각해내는 데 쓰일 것이기 때문이다. 극장 경험에서 제일 좋은 부분은 집에 혼자 오는 것이다. 똑똑한 척하거나 제대로 된 경험을 하지 못해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것. 대성당 앞에 섰을 때 가장 짜릿한 순간은 혼자일 때다. 그 순간에, 그곳에서 비로소 쌍방향의 관계가 생겨난다. 다른 사람이 개입되는 순간 그 관계는 삼각이 된다. 쌍방의 관계는 관계 그 자체인 반면, 삼각관계에는 관계의 퀄리티와 협상이 개입된다. 퀄리티는 언제나 애물단지야, 그녀는 생각했다.

그곳에 마침내 도착하면, 물론 그 노력이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완전히 압도되는 감각 말고는 그 어떤 것에도 참여하고 싶지 않다. 완전히 압도되는 것을 참여의 한 형태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압도되는 것, 혹은 넋이 나가버리는 것은 참여와 정확히 반대된다.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열어두는 것이다. 참여는 기대와 특정한 가치의 실현을 의미하고, 그건 완전한 압도를 용해해버리는 해독제다. 압도되는 것과 익명성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순간 둘 다 바스러지고 만다. 함께한다는 것은 과대평가 되어 있다. 혼자 여행하는 걸 선호한다는 이유로 평가받고 싶지 않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 무엇도 그녀를 놀라게 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의 관심사는 아무것도 발전시키지 않는 것이었고, 그건 그녀의 존재감을 어딘가 이질적으로 만들었다. 화장실에 같이 가는 것이 좋아 보이는 유일한 상황은, 같이 가서 대화를 나누거나, 마약을 하거나, 화장할 때가 아니라, 그냥 서로 볼일을 볼 때다. 특히 그냥 평범한 화장실에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의 머릿속에는 파리에 있는 카페 보부르의 화장실이 떠올랐다. 심하게 과한 디자인, 물론 그것도 어떤 의미에서 압도적이긴 하지만 다른 이유다. 그런 형태의 압도는 단순히 ‘시발 이게 뭐야’에 가깝다. 반면에 함께 오줌을 눈다는 건 지독히 평범한 일이기 때문에, 전혀 압도적이지 않기 때문에, 되려 꽤 묘할 수 있다. 특별히 알지 못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숭고한 순간이 될 수도 있다. 함께이지만 그 경험을 나누지 않는다는 것. 누군가와 오줌을 눈다는 건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나란히 하는 것이다. 남자 화장실에서도 다르긴 하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다.

엄청난 성당이나 그랜드 캐니언 앞에 섰을 때. 누군가와 함께라면, 특히 아는 사람이나 같은 침대에서 자는 사람과 함께라면, ‘무엇’을 보는지보다 ‘함께’ 본다라는 점이 늘 전면에 나서는 것 같다. “우리 그때 그거 기억나…” 그게 뭐였는지는 사라져 버리고 “너 정말 웃긴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라거나 “물이 더럽게 비쌌는데 심지어 차갑지도 않았어.” 따위만 기억난다. 경험을 정의하는 것은 웃긴 모자도, 생수병도 없이, 그곳에 오롯이 혼자 서 있는 순간이다.

도시에 도착했고, 그걸 보러 갔고, 다시 호텔에 돌아왔다. 그 경험은 정말 바보 같았고, 거의 무균성이었지만, 그것과의 만남은 압도적이었다.

“그게 뭐였는데, 어떤 느낌이었는데? 무슨 생각이 들었는데?”

“아무런 느낌도 안 났고, 아무런 생각도 안 들었어. 그게 뭐였는지 전혀 모르겠어. 그냥 압도적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