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할 때 그 여정이 내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한 여정이 다른 사람의 것이 될 수도 있나? 여행이 운명에 의해 전개되는 것, 숙명이 직조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환상인가? 이번 여행은 분명 내면으로의 여행은 아니었다. 전혀 아니었고, 그보다는 확정성이 물러나는, 혹은 끊임없이 환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여행이었다.

환상. 그들은 이미 주기적으로 환상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이 단어가 다소 동양적으로, 그러니까 선불교스럽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환상은 언제나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지기보다는 결핍이나 부족함과 공명한다는 점에 동의했다. 통속적인 의미에서의 환상은 현실의 이상적인 버전들로 구성된 것으로, 결국 현실로부터 도망가기 바쁜 사람을 승인해주는 것이다. 다른 한편, 환상을 일종의 도피로 이해하고 싶은 유혹도 있다. 현대 사회가 망각하고 잃어버리고 파괴한 종교적 믿음에 대한 대체물로 간주하고 싶은 유혹 말이다.

시간의 가속. 그 악명 높은 시간 경험의 분절. 시간의 가장 작은 단위까지 상품화되는 현상. 이런 요소들은 오늘날 비전을 갖는 것이 왜 불가능해졌는가를 흐릿한 초점으로나마 살피는데 중요한 고려사항이다. 비전은 과거의 것이다. 역사가 바로 지금, 이 순간 생성되지 않았던 시대에나 가능했던 것이다.

이미 여행 초반에 명백히 드러난 것은, 환상 그 자체가 결핍이 아니라, 인간에게 결핍된 것이자, 동시에 인간 안에서 흘러넘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환상을 몹시 과장해서 이해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그런 환상에 빠질 여유 따위는 없다. 아무튼, 환상이 이거든 저거든, 이 여행은 실재했고, 여기서 중요한 건 물리적인 이동이었다.

누군가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한다는 것. 그것도 좋지만, 그것이 진정 여행인지, 뭔가 다른 것이 아닌지는 질문해볼 수 있다. 포렌식 수사에 좀 더 가까운 건 아닌지. 책임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미 정해진 길을 여행하는 것은 일종의 안도감을 주는 경험일 수 있다. 독창적인 여행자는 그가 내린 각종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정해진 길에서는 내가 한 거 아니야, 나는 그냥 정해진 대로 했을 뿐이야, 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그밖에 또 다른 선택지는 길이 정해져 있는 여행에서도 완전히 새로운 관점들, 새로 보는 방식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대안적인 발견들에 다다르는 것이다. 몇 명이나 필리어스 포그의 여정을 따라가 봤을지 궁금하다. 예상보다 적기를 바랄 뿐.

편지는 늘 도달해야 할 곳에 도달한다고들 하는데, 여행도 그럴까? 엽서는 이래저래 뒷면에 적힌 주소와 일치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올바른 수취인에게 도달하기 마련이다. 어쩌면 이건 결국 따지고 보면, 모든 여정이 자신의 것, 즉 여행자의 것이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여행은 절대 다른 사람의 것이 될 수 없다. 여행은 언제나 내가 돕건 돕지 않건, 제 종착지를 찾고야 마니까.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절대 나의 것이 될 수도 없다. 진짜 여행한다는 것은 나를 내려놓는 것이니까.

생각해볼 수 있는 또 다른 선택지는, 모든 여행은 어느 정도 다시 회귀하는 여행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다시 시작점으로 회귀하는 여행. 일종의 퇴행. 그렇다는 건 모든 여행이 결국은 집으로 회귀하는 문제라는 뜻일까. 그건 끔찍한데. 아니, 모든 여행이 결국 근원에 관한 문제이거나, 기반을 찾는 것,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라면. 나의 모든 여행이 회귀이자, 어디론가 회귀하는 여행이라면. 설사 그 목적지가 수천 번 바뀌더라도, 목적지에 도달한다는 것이 내가 진정 머물러야 할 곳을 찾는 거라면. 그게 전부라면 차라리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편이 낫다. 또 다른 방법은 ‘회귀’를 근원이나 진정 내가 있어야 할 곳을 찾는다는 의미 대신, 정복이나 점령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내 앞에 놓인 것이 무엇이건 회귀한다는 것. 그리고 ‘회귀한다’는 건 ‘되돌아온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다. 그녀는 회귀라는 개념을 집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랬을 때, 집이 없다면, 출발지가 없다면, 목적지는 대체 뭐란 말인가?

그 둘은 필연적으로 도래하게 될 침묵이 두려웠다. 그 어색한 순간을 떨쳐버리기 위해 계속해야 떠들어야 하는 상황이 그들 모두를 두렵게 했다. 이 세상에는 불가능한 상황을 이른바 떠드는 것으로 극복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너무 많다. 이를테면 계속해서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얼어죽었을 거라는 둥. 마치 무엇에 관해서든 떠들기만 하면 자동으로 기운이 나는 것처럼.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반드시 다친 사람에게 말을 건다. ‘날 두고 떠나지 마…’ 아니 도대체 ‘넌 할 수 있어’ 따위의 클리셰를 들으며 죽어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나? 그녀는 언젠가 도둑맞았던 때를 떠올렸다. 그 기억은 아주 쉽게 떠올랐다. 아니, 그 사건은 수년 전에 일어났음에도 그녀의 대뇌 피질에 영원히 각인되었다. 정확하게 트라우마가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언제나 그녀 곁에 존재했다. 아니, 어쩌면 상존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트라우마가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어머니도 아이도 트라우마의 일종일 수 있고, 아무도 안 듣지만 떨쳐버리기는 진심 힘든 비틀스도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 이 경우 롤링 스톤즈도 포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건 더 최악이다. 아직 숨 쉬고 있는데 벌써 미라가 된 거나 다름없으니까. 아직 숨 쉬고 있는 거 맞나.

트라우마는 능동성인가 수동성인가, 아니면 능동성인데 변치 않는 것인가? 트라우마가 수동적인 것이라면 고통스러울 수는 있지만, 잘하면 제거할 수도 있다. 어떤 영화들에서 기술이나 마법 같은 걸 이용해서 특정한 기억을 삭제하는 것처럼 말이다. 반대로 트라우마가 능동적인 것, 활동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변화한다는 의미이고, 따라서 트라우마의 자격을 상실하고 그저 이상한 것, 상처 같은 것, 아니면 짜증 나는 것이 되어 버린다.

어쩌면 나라마다 다를 수도 있다. 스페인은 어떨까? 트라우마가 문화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결코 모순이 아니다. 트라우마는 기독교 믿음 체계를 기반으로 하는 윤리에서만 발생하는 현상일까? 누구더라, 한 소련의 시인인지 뭔지 하는 사람이, 소련연방에서는 정신분석학이 성립될 수 없는 용어라고 지적하지 않았던가? 모든 것이 국가 소유인 곳에서는 개인이라는 주체가, 즉 트라우마나 히스테리, 심지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가진 개인이라는 존재가 성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로 트라우마를 겪은 것은 자본주의지, 소련이 아니다. 트라우마는 소련 문화권과 양립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누구였더라. 시인이었던 것 같은데, 심지어는 노벨상 수상자였던 것 같은데, 알게 뭐람.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느라 원래 발전시키고 있던 생각으로 돌아갈 방법을 놓쳐버렸다. 연상들이 계속 이어지면서, 그녀는 정신이 발전과 관련되어 있는지 질문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 생각을 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그녀는 아무것도 발전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발전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만큼, 그 저항하고자 하는 시도가 결국은 똑같은 발전의 환영이라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트라우마와 같은 문제, 그러니까 정신은 결코 사람들이 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바깥에서 이해될 수 없다는 문제에 부딪힌 것일까? 그녀는 발전이 인류에 근원적으로 내재되어 있다는 생각을 일축했다. 어떤 것들은 발전하고, 어떤 것들은 발전하지 않는다는 논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이분법적 대립으로 배열하라고 훈련받은 우리 인류의 암울한 모습이니까. 그녀는 이 문제에 관해 시간을 갖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조금 더 시간을 가졌다.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도 얼마나 더 오래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시간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면, 하나씩 늘어놓을 수 있는 개체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라면, 생각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과 동일한 주의력의 양식 안에 기입된 것일까? 그녀는 자기만의 영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생각이 영화처럼 펼쳐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대놓고 경멸했다. 인간 문화는 이미 이미지로 포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문화권에서 그런 것은 아닐지라도, 너무 많은 문화권에서 그렇다. 이 여행, 이들이 어쩌다 보니 어느새 합류하게 되어 버린 이 여행도 이미지와 관련이 있다. 할리우드가 모든 여행을 로드 무비로, 긴장과 이완 냄새가 잔뜩 나는 극적인 서술로, 반드시 끝나야만 하는 무언가로 만들어버렸다는 점은 비극적이다. 이제 모든 여행은 영화적인 95분 안에 구겨 넣어졌고, 정처 없이 떠도는 기행이나 짜증 날 정도로 유목민적인 노숙 같은 요소들은 사라졌다. 하지만 품격 있는 여행은 출발하는 것도 아니며, 여기에서 저기로 이동하는 경험을 용해하고, 무엇보다 목적지에 관한 가장 희미한 소문마저도 피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