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흑 속에 잠겼던 꿈들이 떠올랐다. 그녀가 방금 경험한 것, 그녀의 몸이 반응을 일으킨 그 대상은, 풀밭과 태양과 바람이 있었던 초원도 아니었고, 처음에는 구역질나는 기분을 들게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곳이 자기가 돌봐야 하는 장소라는 것을 알았다. 암흑 꿈들은 이후에 일어나는 변화 말고는 서로 잘 연결되지 않는 인생의 시기들에 주기적으로 등장했다. 악몽도 아니었고 그녀의 영혼을 달래주지도 않았다. 독방에 갇힌 것 같은 정적인 감각도 아니었다. 감옥도 아니었지만, 심연으로 열린 어둠도 아니었다. 때로는 초원과 풀밭과 태양과 바람으로부터 거리를 둬야 할 때도 있었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몰랐고, 그곳을 대체해서 자기를 내맡길 수 있는 수 있는 다른 곳도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너무도 친숙하고 딱 맞아떨어지는 곳으로 도피하지 않는 것은 때때로 그녀에게 시급한 일이 됐다. 초원과 풀밭과 태양과 바람이 있는 장소의 특징은 표류하는 감각, 차분한 수평의 파도에 사로잡히는 감각을 누리며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꿈속 암흑에서는 뭔가 다른 이유로 표류하는 대신 머물러야 했다. 머무르도록 허락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불가피한, 행동을 촉구하는 강렬함 때문이었다. 그녀는 초원과 풀밭과 태양과 바람뿐만 아니라 그곳으로 도피하는 자신을 증오했다. 그곳은 망각의 장소이자 수동성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변화가 존재하지 않았고 모든 것과 연결된 기분,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있는 것 같은 기분만이 중요했다. 암흑은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그녀에게 관여할 것을 촉구하는 동시에, 그녀가 손을 뻗는 즉시 뒤로 물러났다. 모든 것의 가용성은 얻기 힘든, 튕기는 감각으로 교체됐다. 초원, 풀밭, 태양, 바람에서는 바라보는 것과 그곳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 모두 중첩된 이미지로 존재했다. 마치 보는 것과 그 안에 있는 것을 구별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것은 이미지였고 그 이미지들은 그녀가 모든 것의 일부라는 점을 승인했다. 이곳에서는 그녀가 반대할 수 있는 것도, 심지어는 의견을 낼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곳은 의견이 부재한 곳이었고 그녀는 자기 목소리가 잠재워지는 듯한 경험을 흐릿하지만, 분명히 했다. 규율의 개입이나 징벌보다는 안락한 통제 과정 같았다. 값비싼 구스다운 베개에 싸여 질식하면 이런 느낌일까 상상했다. 암흑은 그녀에게 뭔가 다른 것을 요구했다. 말을 하라고, 목소리를 내라고, 개입하라고 보챘다. 암흑은 이미지를 실어 나르지도, 그 무엇도 소통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이미지뿐만 아니라 뭔가 다른 것을 만들어낼 수 있게 했다. 꿈속 암흑은 이미지를 만들게 하지만, 그 이미지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틀이 아주 적거나 아예 없었다. 이건 그녀가 포착한 이미지가 아니라, 만든 이미지였다. 그것들은 그녀의 창조물이었는데, 혼란스러운 점은 이 이미지들이 뭔가를 승인하지도, 그녀의 소유물도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녀가 만든 이미지였지만 그녀에게 속하지 않는 이미지였다. 둘이 다리 밑으로 점점 더 내려갈 때쯤, 그녀는 눈을 찡그리고는, 그건 이미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암흑 속에서 진짜로 일어나는 것은 (늘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무시하기에는 너무 자주 일어나는 것은) 그녀가 발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이었다. 발상을 갖는 것과 발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발상을 갖는 것은 쉬운 일, 비교적 쉬운 일이었지만, 그것을 창조하는 것은 전혀 쉽지 않았다. 발상은 암흑, 완벽한 불투명성을 필요로 하는 창조 행위니까. 발상은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둠 속에 머문다. 발상은 예측할 수가 없고 그 어떤 책임도 갖지 않는다. 그녀가 초원, 풀밭, 태양, 바람에 머물렀을 때, 그녀는 모든 것으로 용해되었고, 모든 것이 그녀가 되었지만, 그건 그것들 안으로 떨어져 내리는 경험이었기 때문에, 마치 모든 것이 그녀의 것이고, 집이나 사람에 딸린 정원처럼 그녀가 소유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 고립된 느낌, 개인적인 감각 옆에 암흑이 놓였다. 암흑에서는 이미지, 그리고 발상들이 그녀로부터 발생하지만, 그녀에게 소유되지도, 그녀가 그것에 소유되지도 않는다고 느꼈다. 암흑 속에서 그녀의 정체성은 흐릿해져 거의 지워졌으며 그녀에게서 발생하는 것들은 공적인 것, 모두의 것처럼 느껴졌다. 무슨 상관이야, 그녀는 결론 내렸다. 발상은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누군가 그걸 집에 가져가서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순간 그것은 더는 발상이 아니라 제안이 되고, 어쩌면 이론이나, 주장, 혹은 더 심하게는, 조언이 되고 만다. 그녀가 다리 위에서 벽에 머리를 기대고 잠을 청하는 어린이들을 보면서, 영혼에 괴로움과 고통을 불어넣는 안개를 통과하면서 경험한 것, 그녀의 몸이 표현한 것은 뭔가에 대한 반응이 아니었다. 그것은 실재하고 존재했지만, 그것은 어린아이들을 향하지도 않았고, 그녀가 마음을 열어 받아들인 가난과 고통에 대해 인과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 몸 안에서 그것을 인식했고, 뭔가 행동을 할 준비가 됐다. 몸에 남은 관능적인, 심지어는 성적인 감각, 그 욕망이 그녀에게 불러온 어떤 불가역성, 그 앞에서 완전히 알몸이 된 것 같은 감각, 그녀에게 일어났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을 이해하거나 거기에 이미지를 부여하는 것은 연속의 한 형태였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이 자고 있는 상황에 대한 반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반사였지만, 태양이 유리에 만들어내는 종류의 반사였다. 빛이 잎사귀들을 통과해 그림자를 만들어낼 때, 성당 창문의 색유리들이 섬세한 색채들을 만들어낼 때. 그녀의 몸을 구역질로 떨리게 했던 감각. 자기 자신이 두려워졌던 그 감각은, 꿈속 암흑이 현실로, 혹은 현실로부터 새어 나오는 것이었다. 그녀의 몸에 움직임을 불어넣었던 온기가 손에 만져질 듯 했다. 그녀를 부르는 것은 암흑이었다. 숙주를 찾는 발상들이었다. 뭔가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고 있었고, 변화가 찾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