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옆에 앉은 사람, 동료 여행자. 아니면 동반자? 마음을 정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아니, 사실 동반자는 원치 않았다. 정말로. 동반자로 규정되는 관계에는 어딘가 불편할 정도로 비대칭적인 데가 있다. 이를테면 부모는 무서운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아이를 동반한다. 보험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쪽은 다른 상대를 필요로 하고, 동반하는 사람은 뭔가를 보장한다. 무사히 귀가할 수 있게 하고 그밖에 있을 수 있는 많은 위험을 제거한다. 동반자는 모험을 막는 방패다.
그럼 그들은 친구인가? 그것도 아니었다. 둘은 서로에 관해 사실상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알아야 하는 것보다 더 많이, 어쩌면 건강한 관계보다 더 많이? 친구와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우정에는 어딘가 끈적한 데가 있다. 친구는 왠지 곁에 있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 같고, 바쁜 것은 다 제치고 무조건적으로 헌신해야 하는 느낌이다. 불편한 걸,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지 않으면 오직 하나의 화폐로 귀결됐다. 죄책감. 그걸 거래하는 은행의 이름은 복수다. 그녀는 보증된 우정에 딱히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관계를 가치의 배치로 환원한다는 게 어딘가 너무 유치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언제나 네 곁에 있었어’라는 문장 뒤에 언제나 ‘그렇기 때문에 너는 이런, 저런 의무가 있어’라는 말이 따라온다면. 허가증이나 보증금에 서명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정은 계약이 되어서도 안 되고, 상호호혜가 그 기반이 되어서도 안 된다.
아는 사람 중의 하나는 3주에 한 번씩 그녀에게 연락했다. 그 습관이 생긴 이래 그녀는 그자를 더는 친구로 여길 수 없었다. 반짝였던 관계가 사업 계약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대도시 사람들 특유의 태도일지도 모른다.
둘은 그 어떤 고전적인 의미에서도 친구라고 볼 수 없었다. 그들 사이에는 서로 곁에 있어 준다는 것이 상호호혜적으로 되어야 한다는 기대가 전혀 없었다. 그들 간에는 그 어떤 ‘거래’도 없다는 것이 그녀에게 큰 안도감을 줬다. 빚도 확실히 없었다. 그들의 관계, 혹은 비-관계는 무조건적이었다. ‘나는 언제나 네 곁에 있어’라고 말하면서도, 그에 따르는 기대는 모두 버려지고 뒤로 밀려났다.
재미있게도, 그들이 함께하는 여행은 그 어떤 신뢰도 기반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녀는 바로 그래서 그들이 함께 보내는 시간이 활기차고 기민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부재는 부정적인 것도 아니고, 배신의 결과물도 아니었으며, 그들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매 순간을 협상하게 했다. 다음이 핵심이었다: 그들의 관계에서는 각자의 위치가 명확하지 않았고, 모델이 없었으며, 책임과 관련해서 정해진 것이 없었다. 에피소드가 없었고, 그냥 계속해서 이어지는 연속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아우성이 공유될 수 있는 것이라면, 아마 이 관계를 그릴 수 있는 좋은 이미지일 것이다. 그들이 함께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은 궤도나 정착지가 아니라, 풍경이었다. 그리고 운 좋게도 이들은 지도를 잊어버리고 안 가져왔다.
동반의 관계에서는 합의된 윤리가 존재하며, 그 합의는 제삼자에 의해 강화되는데, 여기서 제삼자는 일반적으로 개인이 아니라 관습인 경우가 많다. 한 관계가 이처럼 바깥으로부터 지원받기 위해서는 바깥의 시선에서 인식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동반 관계의 윤리는 결코 동반자들의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 부과되는 윤리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책임을 지는 것과, 한 사람이 자신이 마주한 상황에 적합한 책임의 역학을 판별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특히 전체와 한 개인의 관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부담스러울 수는 있지만 비교적 간단하다. 따라 하면 되는 대본이 이미 존재하니까. 그녀가 살면서 마주하는 거의 모든 상황에는 한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고 어떤 식으로 참여하면 되는지에 관한 프로토콜이 주어져 있었다. 관습적인 의미의 책임은 위계적이고, 모든 것을 동질화한다. 그녀가 게으르고 안전한 곳에 머무르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닌 이상, 왜 그런 권력 앞에 자기 자신을 노출해야 한단 말인가.
다시 생각났지만, 그녀는 필경사 바틀비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떤 난관 앞에서 ‘그러지 않는 편이 낫겠습니다’라는 형태로 책임을 지는 것은 분명히 그녀의 방식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필경사를 우러러보았지만, 그녀에게 그는 수동적 공격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고 모든 각도의 접근을 무력화함으로써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이었다. 때때로, 특히 높은 하이힐 구두를 신었을 때, 그녀는 그 필경사의 위대함과, 어떤 이는 선불교적인 세계관이라고 묘사하는 필경사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녀는 멜빌의 소설을 분석하는 책도 몇 권 읽어봤지만, 몹시 지루해 잠들어버리거나, 그 작가들이 어딘가 바틀비를 극기심 강한 캐릭터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같아 갈피를 잃어버렸다. 그녀에게 바틀비에서 유일하게 모호한 지점은 그의 직업 묘사였다. 그는 계약인지 매뉴얼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을 카피했는데, 그녀는 카피, 즉 복사하는 행위가 생산이나 창조 행위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것인지 궁금했다. 그녀는 스키장이나 유람선에서 밤마다 커버 송을 부르는 밴드들을 떠올렸다. 매일 매일 다른 사람의 독창성을 카피하는 사람은 장기적으로 어떤 사람이 되는 걸까? 그 실천에 헌신하기 위해서는 독창성, 창의성, 그리고 어쩌면 사람들의 인정조차도 부차적인 것이 되거나, 무가치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 감탄스러웠다. 댄스 플로어에서 창조적이고 잘나 보이고 싶은 욕구는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 물론, 자신이 반동적이라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그녀는 디스코나 클럽에서 재미있는 사람처럼 보이거나 특별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 그냥 춤에 몰두하거나 춤만 추는 것으로는 불안해서 과도한 유머를 시도하는 사람들이 비극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춤은 그런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정체성, 책임감, 승인으로부터 잠시 쉬는 시간을 갖는 것. 현실 도피주의적이긴 하지만, 계급, 나이, 키, 젠더, 성적 지향, 심지어는 인종으로부터도 잠시 벗어나는 것. 그녀는 ‘평등’과 ‘동등하게’를 구분하기를 좋아했다. 중요한 것은 평등이 아니라, 동등하게 존재하는 것이었다. 모두 동등하게 댄스 플로어에 존재할 때. 물론 자기 자신을 포기한다는 것은 긴장감을 유발할 수 있다. 자기가 살짝 용해되는 경험이니까.
그녀는 책임감에 관해 정해진 규정이 약하거나, 심지어는 존재하지 않는, 그래서 관계, 상호작용, 반응, 활동, 지지, 권력 등이 새롭게 표현되고 이해되어야 하는 환경을 찾고 있었다. 이런 장소나 맥락에서 신뢰는 실천하는 것이지 충실히 지켜져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이런 실천은 그것이 무화하고자 하는 기존의 규칙을 재생산하지 않도록 세심히 검토되어야 했고, 끊임없이 갱신되어야 했다. 평등은 어떤 상태가 아니라 계속되는 실천이다. 그 역할은 누군가 나와서 “짠, 이제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라고 외치는 일이 없도록 살피는 것이다.
매번 다른 목소리 톤과 강세로 말하긴 했지만, 그녀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충성과 연대는 호환될 수 없다.” 충성은 기사들이 원탁에 둘러앉아 맹세하는 것이다. 그것은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돌에 새기는 것이다. 연대는 실천하는 것, 계속해서 실천하는 것이다. 영어로는 균형을 말하는 밸런스와 저울을 말하는 밸런스가 같은 말이라는 것이 참 안타깝다. 균형은 결코 완벽한 평형에 도달할 수 없다. 감지할 수 없더라도 저울은 언제나 조금은 균형이 안 맞는다. 균형은 언제나 연속적이고, 심각하게 불확실하다. 그녀는 균형과 연대가 친구는 아닐지 모르지만 서로 우호적이라고 생각했다. 반면에 충성은 근처에 누가 있던 언제나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맞은편에 앉는다.
그녀는 경계의 중요성을 말하는 사람들이 늘 불편했다. 어쩌면 그녀가 폭력에 관해서 너무 예민한 것일지도 몰랐지만, 경계는 그녀에게 정확히 폭력으로 느껴졌다.
“경계를 설정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야. 뭐가 괜찮은지,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것.”
그녀에게 경계라는 관념은 폭력의 탄생을 말했다. 함께 살기 위한 인간관계가 ‘금지’를 기반으로 할 수는 없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이름이 주어진다는 것부터가 이미 어떤 경계 안에 심어지는 것 아닐까? 그녀의 이름은 샌드위치를 너무 꽉 조이고 있는 셀로판지처럼 그녀를 짓눌렀다. 이름이 만들어 낸 그녀의 많은 부분. 이름 때문에 그녀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경계들. 주어진 이름을 받아들이기 위해 한평생이 걸렸지만, 개명하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정체성에는 언제나 두 가지 측면이 있다. 그녀는 자기가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특권은 보유 여부의 문제라기보다는 ‘어떻게’의 문제였다. 특권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특권을 어떻게 재산의 한 형태로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
정체성이 없다면, 자유로울 테지만, 안중에서 사라질 것이다. 경계 없이 살 수 있겠지만, 티켓도 살 수 없고, 목소리도 가질 수 없다. 정체성은 뭔가에 맞서 싸우고, 목소리를 내고, 인정받기 위해 필요한 전제 조건이지만, 분명한 감옥이기도 하다.
미처 생각이 정리가 안 되었을 때 동료 여행자가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이 감옥이 그토록 많은 사람의 마음을 끈다는 것이 몹시 이상하면서도 분명했다. 특히 가장 낮은 바닥에 사는, 아직도 설 자리가 없는 사람들과 가장 잃을 것이 많은, 하늘에 가장 가까이에서 사는 사람들 모두의 마음을 끈다는 것이. 감옥이 없다면 목소리도 없고, 목소리가 없다면 투쟁도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이 감옥은 변화를 방지하는 보증서이자, 가치의 수호자다.
나란히는, 이 감옥을 조금은 덜 두드러지게 만든다. 맞은편보다 나란히를 선호하는 것은 저항의 한 형태라고 생각했다. 작고 미미하지만, 고집스러움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