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든 것이 시작되었을 때, 목적지는 이야기되지 않았다. 그들 중 누군가는 길보다 풍경이 흥미롭다고 주장했다. 길은 항상 여행자를 어딘가로 데려가고, 이런저런 장소들로 인도하는 반면, 풍경은 그냥 펼쳐져 있고, 좋은 풍경이라면 어디든 상관없으니까. 종점까지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모르는 상태로, 그저, 우리가 지금 여기 있다는 감각, 이곳은 언제나 그 어떤 곳이든 될 수 있다는 감각을 가지고 여행한다는 것은 굉장하다. 물론 풍경이 그렇게까지 열려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풍경은 사실 여러 목적지와 휴게소와 간식이나 지도나 피임약 같은 것을 살 수 있는 그럭저럭 괜찮은 가게들이 이리저리 가로지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 낭만적인 것은 풍경에서는 당신이 무언가에 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당신에게 와서 부딪힌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뛰어드는 것은 쉬웠다. 친숙한 장소에서 출발하는 것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수월하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이 여행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인지, 상대적으로 덜 친숙한 곳으로 가는 것인지,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가는 것인지에 따라 달려 있지만 말이다. 그들 중 누군가는, 약간의 망설임 끝에,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언제나 (혹은 아주 자주) 불안을 수반한다고 말했다. 베이스로 귀환할 때의 미니 우울증 같은 것. 진지하게 생각하기에는 너무 미미하지만, 내면에서는 리히터 스케일로 측정할 수 있을 정도의 진동이 발생하는 우울. 몇 달 만에, 혹은 며칠 만에 어떤 이유에서건 다시 집에 돌아올 때, 집이 비어 있는지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미묘하게 깔린 퀴퀴함을 제외하고는 바뀐 것이 아무것도 없는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내면의 공허함을 무한한 방종으로 채울 수 있는 특권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 미적지근한 회색빛으로 빠져들어, 짐을 푸는 것도 잊은 채, 다 먹을 수도 없는 음식을 앱으로 배달시키고, 척추 맨 끝에 도사리고 있는 우울감에 마음껏 굴복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누군가 있는 집, 심지어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오는 것,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떠드는 것을 행복하게, 신나게 듣는 척 연기해야 한다는 것은 때로는 위협적인 일이 될 수 있다. 포옹, 친숙한 팔로 끌어안는 몸. 그런 것들에 대해 기대했던 것과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날 때의 경험이 완벽하게 비대칭적이라는 사실은 늘 엿 같다. 드디어 차분히 안정을 찾고, 쌓였던 긴장을 풀어헤치고, 숨을 깊이 내쉬며 스트레스와 허리 통증이 공중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을 느끼려던 찰나, 웬걸, 숨은 여전히 내쉬지만, 그 즉시 또 다른 불안을 들이마시고 만다. 집에서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재난의 가능성. 집을 비워달라는 통보나, 더는 손 쓸 수 없게 되어버린 보일러 같은 것들이 마음속에 산사태처럼 밀려든다. 심장은 제 자리를 찾는 대신, 그 반대의 감각, 그러니까 죄책감, 불안, 두려움, 공허함, 후회 따위를 뚫고 가슴 속에 치오른다. 물론 마음이 충만해지긴 하지만, 결코 즐거운 느낌은 아니다.

그 후 한동안은 그들 중 한 명이 행동에 나서서, 집이나 자기만의 방 같은 개념을 폐기해버렸다. 거기서 반쯤 망가진 바퀴가 달린 가방을 유일한 지지대 삼아 서 있는 것만은 안 해도 되도록 말이다.

시간이 지나, 이미 여정이 시작되었을 때, 준비에 관한 대화가 수면에 떠 올랐다. 임박해서 짐을 쌀 때 밀려오는 패닉이나, 목적지에 도착할 때 마주하게 되는 존재론적인 붕괴나, 도래할 스트레스를 예상하면서 시간을 끌 때의 경험들. 그러면서 잊어버릴 수 있었던 것을 계속해서 걱정하며 시간을 유예하고, 가방을 채워나가면서 삶에서 비켜난 비-시간을, 삶과의 거리를 늘어뜨렸던 일들.

“짐 싸는 게 제일 싫어”. 얼마나 부끄러운 자백인가. “짐 싸는 게 제일 싫어”라는 말에는 어딘가 지독히 우쭐대는 느낌이 있다. 왠지 외모가 뛰어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말 같은 느낌.

“짐 싸는 게 제일 좋아”라는 말 역시, 꼭 그렇지는 않지만, 대개는 똑같이 한심한 말이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자위를 자기돌봄이라고 부르는 부류다. 동네 마트에서 산 바디로션을 감상적인 의미가 담긴 용기에 옮겨 담는 부류.

방향이 부재했기 때문에 뛰어드는 것은 수월했다. 따지고 보면, 목적지가 없다면 실망할 일도 없다. 설령 어딘가에 도착해놓고 보니 그게 여행의 끝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곳에서 실망할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탐험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탐험은 알지 못하는 흐릿한 영토에 발을 들여놓는 것일까? 탐험은 언제나 방향과 목적의식이 있고, 심지어는 일련의 도구를 수반한다. 탐험은 엉뚱한 방식으로 진행될 수는 있지만, 어딘가 친숙하고 안정적인 곳에서 출발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의지할 곳이 없는 순간이 오면 탐험가는 결국 자기 자신을 지지 삼을 것이다. 탐험은 어딘가 열려 있다는 느낌, 자유롭게 모험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동시에 정보든 뭐든 흡수하거나, 수확하거나, 수집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따지고 보면 결국 탐험은 모호한 영토들을 합병하고, 거기에 이미 수립된 지식의 형식에 따라 가치를 부과하는 행위다. 진부한 얘기지만, 탐험은 제국주의적인 실천이다.

여행을 어떤 방식으로 해나갈지 결정하는 것이 점점 더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냥 유기적으로 펼쳐지게 두기로 했다. 수단은 언제나 가능한 결말들을 암시적으로 제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수단을 미리 결정하는 대신 우연에 맡기면, 목적지의 결정을 최대한 유보할 수 있다. 쉬이 예상할 수 있듯, 그들 중 누군가는 우연이 생각만큼 임의적이지 않다는 점을 지적했다. 특히 주어진 선택지들이 유한할 때 말이다. 하지만 이런 말로 불필요한 법석을 떨 필요는 없었다. 이 여정은 체제 이론가들을 위해 고안된 여행도, 통계학적 방법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학자들을 초대하는 패키지여행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각자 방식대로 사는 거다. 유기적인 방식은 이래저래 좋은 접근인 것 같았고, 희미하게나마 가능한 반대의 지점들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어딘가 만족스러웠다.

어려운 출발이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는 여정에 신용카드와 충전기 말고는 뭘 가져가야 하나? 최소한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갑자기 떠날 수 있는 기회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여행 준비는 영원히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출발하기 전에 어떤 순간이 발생했다. 누가 시작했는지, 누가 이어 나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일은 이런 식으로 펼쳐졌다. ‘나타난다’는 것은 사실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진짜로 나타난다는 것. 어떤 약속에 늦게 나타났다 뭐 이런 의미가 아니라, 진짜 나타난다는 것. 나타난다는 것은 그 어떤 예상보다도 앞서 나가는, 그 무엇도 기대하지 않고 여행에 떠나는 것, 그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는 기술 아닌가? 일반적인 (그게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기대로 가득 찬 꾸러미를 잔뜩 들고 나타나는데, 이 기대들은 늘 숨겨진 정치적인 함의와 윤리와 도덕 따위에 흠뻑 적셔져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기대는 경험을 가로막거나, 불확정성을 몰아낸다. 기대는 무방비 상태에 대한 방어 기제다. 옛말에, 바지를 무릎까지 내렸는데 화장실 문이 열린다거나, 집 안을 훔쳐보다가 수염이 우체통에 낀다거나 하는 그런 상황들 말이다. 기대는 장갑과 털모자로 대변되는 상징적인 드레스 코드다.

나타난다는 것. 출발은 무언가 뒤에 남겨졌다는 걸, 어떤 형태로든 무언가가 남았다는 걸 의미한다. 안도감이나 죄책감 같은 것. 수치심, 배신, 우정, 아니면 집. 물론 기억도. 출발에 있어서 기억은 언제나 문제가 된다. 물론 기억은 대체로 문제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는 특히 기억에 애착을 갖고 그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는 수상쩍다고들 여긴다. 한 사람이 모은 기억의 양은 그 사람에게 주어진 미래의 양과 반비례한다. 기억은 앞으로 오게 될 것에 걸림돌이 되고, 체제를 막히게 하고, 아무도 살지 않았을 풍경에 길을 만들어낸다.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어떤 이미지가 형체를 갖기 시작했다. 무엇을 남기고 갈지 슬퍼하며 미래 속으로 뒷걸음질 치며 들어가는 것. 출발은 그런 걸 의미한다. 이제 이들은 씩 웃고는 그로부터 돌아서야 할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출발’ 대신 ‘떠나기,’ 과거에 등을 돌리고 여행에 나서기, 그게 뭐였든 간에 놓아주기. 그들은 바로 그 순간, 출발보다 떠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떠나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나타나기 위해 필요한 만큼의 훈련이나 재능이 따라야 한다. 특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떠나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능력이다. 한 존재가 마치 속삭임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지금 이 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서서히 사라질 수 있을까? 그녀는 마치 한 번도 이곳에 존재한 적이 없는 것처럼 슬그머니 떠났다. 부재가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 있도록, 심지어는 부재의 부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진동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

다른 한편, 떠날 수 있는 것도 특권이라고 볼 수 있다. 출발은 책임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을 의미하지만, 떠나는 것은 외로움을 들이마시고 책임을 내뱉는 것이다.

금단의 사랑에 관한 영화에서 연인들은 함께 떠나는 환상을 갖는다.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 보통 사람들처럼 사랑하며 살 수 있는 곳으로 떠나자. 이때 출발이라는 말은 결코 쓰이지 않는다. 무조건적인 사랑은 언제나 출발하는 게 아니라, 이 세계를 떠나는 것이다.

어느 순간 사고가 났다. 어떻게 몸에 가해진 경험이 그렇게나 많은, 이질적인 흔적들을 남길 수 있는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제기되었다. 눈을 감으면 패인 자국과 흉터와 상처를 더듬을 수 있다. 어떤 흔적들은 여전히 눈에 보이고, 어떤 것들은 희미해지거나 아물었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여전히 피부에 반향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아니다. 눈을 다시 감는다. 몸에 남은 손길의 기억은 언제나 압도적이다. 피부는 열려 있고, 때로는 닫혀 있다. 공항에서 한 남자가 공공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어조로 “손대지 마”라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남자는 같은 말을 한 번 더 했는데, 이번에는 욕설과 불필요할 정도의 공격성이 뒤섞였고, 그러는 바람에 그는 그냥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건 떠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너무 여러 번 떠나야 했던 사람의 절규였을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눈을 감는 것이 두려운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젊었던 어머니의 손길이 남긴 흔적.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똑같은 어머니의 손길이지만 세월에 몹시 거칠어졌던 손. 경험을 전달하는 손길, 살면서 만났던 모든 다른 손길과 공명하는 손길. 어머니의 손길은 그녀의 어머니가 남긴 흔적, 또 그 어머니의 어머니가 남긴 흔적, 더는 어머니라는 존재가 없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어머니의 흔적이다. 혈통은 끊길 수 있고, 새로운 손길은 찾아야 한다.